붉은악마 질서 응원 '숨은 공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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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세계 축구팬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는 경기장 내 붉은 악마 응원단의 열정적이면서도 절도 있는 응원. 그 뒤편에서 남 모르게 땀흘리는 경찰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포터(spotter)' 임무를 수행 중인 경찰청 국제보안계 김종현(金鍾鉉·46)경위. 스포터란 축구 경기장에서 응원 질서를 유지하는 전문 경찰로 극성 팬이 많은 유럽 국가들은 이번 월드컵에도 자국 스포터들을 대거 파견했다. 金경위는 한국 경기가 열리는 동안은 물론, 붉은 악마들이 경기 전에 응원 도구를 설치하거나 경기 후 청소를 할 때도 항상 곁에 머물면서 응원단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다.

"올 초 임무가 주어졌을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붉은 악마를 이해하고 그들 스스로 질서를 지키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서울 신문로에 있는 붉은 악마 사무실을 찾아가 회원들과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결과 지난 4월 붉은 악마와 경찰청이 "월드컵에서 훌리건 난동 방지를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협정을 맺도록 이끌었고, 이것이 이번 월드컵의 응원 질서 유지에 초석이 됐다.

"경기 내내 응원단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국팀이 골 넣는 장면은 한번도 못봤습니다."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 지난 10일 대 미국전에서 미국이 먼저 한 골을 넣었을 때 한국 응원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숨막힐 듯한 침묵이었습니다. 반미 구호가 쏟아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밀려들었죠. 붉은 악마 지도부의 입술만 주시했는데 다행히도 '괜찮아''괜찮아'구호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북소리와 함께 우렁찬 '대~한민국'이 터져나왔습니다."

이런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그는 붉은 악마의 질서 의식에 대해 큰 신뢰를 갖게 됐다고 한다.

"이탈리아와의 경기 때는 붉은 악마 회원들이 운동장에 난입할 것이라는 첩보가 있어 응원석 앞쪽에 경찰 병력을 대거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저는 '절대 그럴 리 없다'며 반대했습니다. 저의 믿음이 옳았습니다."

그는 붉은 악마들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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