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재벌 지분 공개하여 미움 부추기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대기업 기업집단의 소유지분과 순환출자 현황이 공개됐다. '어느 그룹 총수, 또는 그 사람의 4촌이나 8촌은 주식을 얼마 갖고 있다'는 내용의 '주식 족보'를 공정거래위원회가 취합해 낱낱이 공개한 것이다.

공정위 측은 투자자 등에게 구체적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시장감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내용은 대기업들이 숨기는 게 아니라 상장사 사업보고서나 비상장사 감사보고서 등을 통해 스스로 공개한 것이라 굳이 정부가 안 나서도 관심있는 투자자라면 쉽게 구할 수 있다. 또 정부가 일부러 취합해야 할 정도로 국민 생활에 영향이 큰 것도 아니며, 아무리 비실명이라고 해도 그룹 총수의 먼 친척이란 이유로 개인의 주식소유까지 공개당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의 소지가 크다.

더욱이 소유지분 등은 총액출자한도 등 정부가 정한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 적법한 행동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일부러 공개한 것은 그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재벌 총수들이 소규모 지분밖에 없으면서 순환출자 등을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치게 함으로써 재벌에 대한 국민 반감을 부추기고, 이를 통해 그들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은 아닌가.

불법과 편법은 법에 의해 엄단해야 마땅하지만 재벌 또는 총수의 친인척이란 이유만으로 적법한 행위까지 공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런 내용을 낱낱이 까발리는 것이 기업 활동, 나아가 국민 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공정위는 생각해 봤는지 모르겠다.

기업들은 경제 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반기업 정서 해소를 위해 경영투명성 강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판에 정부가 이들의 노력을 돕지는 못할망정 국민 정서를 이용해 재벌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고 이를 통해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것은 경기 회복은 물론 국가 경쟁력 강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