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6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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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눈물이 나면 밥이 거의 된거야.

국원이가 아는 체를 했다. 우리는 둘러앉아서 밥을 한숟갈씩 떠넣어 보고 매운탕 국물도 후후 불며 들이마셨다. 밥도 적당히 잘 되었고 매운탕은 집에서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야, 이만하면 우리도 독립할 만하지 않는가. 강변에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여름날, 해지고 나서 어두워지기 직전의 그 평화로운 정적은 어쩐지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여의도 갈대밭 속에서는 깃을 찾아 내려앉은 작은 물새들이 잠들기 전 아기들의 옹알이 소리처럼 나약하게 울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달이 아직도 푸르스름한 하늘가에 기웃이 걸리고 그 옆에 방랑자 별이 따라붙었다.

풀벌레들이 왕성하게 울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어둠이 찾아왔다. 우리는 사방에서 주워온 나무로 모래밭에 모닥불을 피웠다. 밥을 잔뜩 먹고도 금방 굴풋해져서 국원이와 호식이는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방금 캐낸 흙 묻은 땅콩을 러닝 셔츠에 하나 가득 담아 왔다. 우리는 땅콩을 모닥불 가장자리의 재에 묻어 껍질째로 구워서 먹었다. 국원이가 목걸이처럼 달고 다니던 트럼펫 꼭지를 두 손에 모아 쥐고 언제 들어도 구슬픈 취침나팔을 불었다. 하늘의 별들은 바로 얼굴 위에 매달려 있다가 조금만 흔들어도 우수수 떨어져내릴 것만 같았다.

그때 이후였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물으면 그게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작가'가 되겠노라고 대답하곤 했다.

호식이가 부시럭거리며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여서 아주 점잖게 빨고는 길게 휘이, 하며 내뿜었다. 이발소 주인인 저희 형의 가운 주머니에서 몰래 뽑아왔을 거였다. 국원이가 손가락을 내밀자 호식이가 담배를 그에게 넘겨 주었고 다음은 내 차례였는데 한 모금 빨자마자 눈물과 기침에 한참이나 콜록거리며 눈시울을 닦았다. 아무도 그날 밤에 집 생각을 해본 아이는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여름 해가 일찍도 뜬다는 걸 미처 몰랐었나 보다. 비스듬하게 우비의 지붕 아래로 빗겨 들어온 아침 햇살에 저절로 눈을 떴다. 강물 위에 내려앉았던 물안개가 햇빛에 서서히 흩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서로 깨우고 장난질치면서 모래 구덩이를 파고 제각기 떨어져 앉아 큰일을 보았다. 그대로 발가벗고 텀벙대면서 강물에 뛰어 들어가 저만치까지 헤엄을 쳐서 나갔다가 몸을 뒤집어 천천히 발장구를 치면서 돌아왔다. 어제 잡아 놓은 고기들은 아직도 양동이 속에서 아가미를 벌떡이고 있었고 성질 급한 놈들은 배를 위로 내밀고 죽어 있었다.

-까짓거 아침거리를 새로 잡자.

-지금 배 고픈데 언제 잡아서 매운탕 끓이겠냐.

-아침은 다꾸앙이랑 오이 따다가 고추장 찍어먹고 점심에 한바탕 해보자.

하루가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아침 지어 먹고나니 벌써 땡볕에 강물이 미지근해졌을 정도로 한낮이 되었다. 우리는 강물에 뛰어 들어가 다시 조개도 잡고 민물새우 떼를 보고는 그물을 가지고 가서 떠내왔다. 벌써 강물과 땡볕에 그을기 시작해서 원국이와 나는 코가 반들반들해졌고 살결이 흰 편인 호식이는 발갛게 익어버렸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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