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부패에 대한 국민심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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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심의 분노가 표출됐다. 6·13 지방선거 결과는 김대중(DJ)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에 허탈해하고 분통을 터뜨려온 밑바닥 민심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한나라당이 수도권 광역단체장(서울시장·인천시장·경기도지사) 세곳을 휩쓴 것은 이회창 대통령후보가 내건 '부패·무능 정권 심판론'이 여론과 함께 한 결과다.

월드컵 열기 속에서도 국민은 잊지 않고 DJ 정권의 권력형 비리와 부패를 응징한 것이다.'한나라당은 부패 척결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목소리는 그런 표심(票心) 앞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의 기초단체장에서 무소속 후보들의 대거 약진과 선전은 놀라운 정치적 사건이다. 이 또한 정권 부패에 대한 누적된 좌절과 배신감의 표시인 것이다. 민주노동당 후보의 선전이 예상된 울산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의 승리도 같은 맥락이다.

金대통령은 이런 민심에 압도당하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게이트, 청와대 참모·친인척 등 DJ 주변의 '형님,동생'하는 패거리식 뇌물 먹기, 비선(秘線)의 턱없는 위세, 추잡한 권력 암투에 질색해 온 여론에 비춰볼 때 선거 결과는 이변(異變)이 아니다. 이제 金대통령은 선거 내용에 담긴 메시지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국정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한다. 그 메시지는 부패와 비리 문제를 뒤로 미루지 말고 임기 중에 단호하게 파헤치고 정리해 달라는 것이다.

그같은 자기 반성은 참패한 민주당 수뇌부에게도 절실하다. DJ정권 비리를 놓고 '차별화 반대론'으로 엉거주춤해 온 후보도 이 문제에 새롭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후보 재신임론을 정면 돌파하는 방안이 표심 속에 담겨져 있음을 후보는 깨달아야 한다.

선거 결과는 정치 질서를 흔들 것으로 보인다. 그 한복판에 자민련 김종필(JP) 총재가 있다. 충청권 광역단체장 세곳 중 충남에서만 승리한 것은 JP의 영향력 퇴조를 보여주고 있다. 선거 막판에 충청권 단합을 내세운 JP의 지역감정 호소 전략도 먹히지 않았다. 이는 3金정치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상징하는 극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표심에는 거친 분노가 넘쳤지만 투표율은 역대 선거사상 가장 낮은 48%(잠정 집계)를 기록했다. 이는 정치가 워낙 신뢰를 잃은 데다 월드컵의 한복판에 있는 젊은 유권자들을 선거 쪽으로 끌어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만큼 무관심의 장벽은 단단했다. 이는 승패를 떠나 '풀뿌리 민주주의'의 재정비를 위한 심각한 과제를 던지고 있다.

먼저 지방자치의 틀을 전면 재정립하는 문제를 집중 검토해야 한다. 후보가 누구인지 알기 힘든 1인5표 투표 방식은 유권자들에게 부담스럽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는 기초의회를 없애 광역 의회에 합치거나, 축소하자는 여론을 키울 것이 분명하다.

투표율이 떨어지고 후보 고르기에 정성을 쏟지 않으면 무자격·무능력 당선자가 나올 확률이 높다. 따라서 그런 당선자들을 견제하는 장치를 강화하는 게 주요 과제다. 지난 4년간 사법처리 당한 기초단체장이 46명(전체의 20%)이라는 부끄러운 수치는 그런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 그런 장치의 하나가 주민소환제다. 예산·정책 파탄, 인사 전횡, 부패에 얽힌 단체장을 주민 투표로 임기 중에 물러나게 하는 이 제도의 도입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선거 결과가 대선 가도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나 대선 쪽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곤란하다. 지방자치의 틀과 제도를 정비하고, 지방정치 문화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정치 지도자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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