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질 시급한 주택관련법:30년전 낡은 옷 아직도 못 벗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최근 경기도 용인에 완공된 D아파트는 대형 평형 위주로 건설돼 어린이가 있는 입주 가구가 거의 없다.

그러나 주택건설기준에 맞추다 보니 다른 단지와 똑같이 어린이 놀이터를 지어야 했다. 결국 규정에 맞추려고 억지로 만든 놀이터는 늘 썰렁하게 비어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서울 강남 일대에 불어닥친 아파트값 상승과 뒤 이은 분양가 폭등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분양원가 분석'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진 사실상의 분양가 규제였다. 1998년 시작된 분양가 자율화 정책이 슬그머니 후퇴하는 모습이다.

이러다 보니 집을 마련하려는 사람이나 공급하는 업체나 복잡한 규제와 무원칙한 주택정책에 휘둘려 우왕좌왕하는 게 현실이다.

◇무엇이 문제인가=1970년대 주택보급률이 60%대에 머무르던 시절, 주택정책의 최대 목적은 주택보급을 늘리면서 부동산 투기를 막는 것이었다. 집은 모자라는데 집값은 잡으려다 보니 온갖 규제가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주택건설촉진법·택지개발촉진법·주택공급규칙·주택건설기준 등이다. 이를 근거로 정부는 집 지을 땅을 마련하는 것부터 설계와 건축, 분양과 입주에 이르기까지 단계마다 일일이 간여해 왔다.

이같은 법체계가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주택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주택보급률은 96.2%. 이제 절대적인 집 부족 현상은 거의 해소됐다. 여기에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주택에 대한 관심은 양에서 질로 옮겨가고 있다. 민간 건설업자들도 수요자를 끌기 위해 색다른 주택건설을 시도하고 있다. 주택시장에도 서서히 시장의 수요·공급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주택정책의 틀은 여전히 20세기식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공공·민간주택 구별 없이 '수요자 줄세우기'를 하는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 건설 방식에 대한 각종 강제 규정을 나열한 '주택건설기준' 등이 대표적인 예다.

택지개발촉진법의 경우에도 아파트 분양가는 자율화했으면서 택지는 싸게 공급해 건설회사들에 지나친 차익을 안겨준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원가(땅값)를 낮춰 제품값(분양가)을 안정시킨다는 취지이나 시장에서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정부 대책은=정부도 주택정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건교부 이춘희 주택도시국장은 "72년 주택건설촉진법이 제정될 때는 주택 수를 늘리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으나 이제는 주거의 질(質) 향상을 꾀할 때"라고 말한다.

그는 "주택건설촉진법을 주택법으로 개정하는 작업이 국회에 계류 중이며 내년부터 주택종합 10개년 계획을 세워 장기적인 밑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새로 만들어지는 주택법도 ▶입주자 모집 조건·절차▶주택공급방법▶입주자 자격·재당첨 제한·공급순위 등에 관한 각종 규정을 담고 있다. 결국 주택건설촉진법 때의 규제들이 다수 유지되는 셈이다.

기본적으로 정부가 무주택 서민들의 내집 마련에서부터 중산층의 집 넓히기, 고소득층의 고급주택 장만까지 주택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또는 해결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주택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대안은 뭔가=무엇보다 주택시장의 확실한 자율화가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정호 자유기업원 부원장은 "주택도 다른 상품처럼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도록 규제를 과감히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분양 등 까다로운 청약제도에 익숙한 사람만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은 정보의 불균형을 초래해 오히려 복부인·떴다방을 양산해 왔다. 정부의 규제가 국민을 투기판으로 내몰면서 집없는 서민의 주택마련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안건혁 서울대 교수는 "최근의 집값 상승은 주로 질 좋은 주택에 대한 선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수요자의 욕구에 부응하는 주택의 공급이 집값 안정을 꾀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또 주택시장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자면 우선 원자재에 해당하는 토지시장의 기능 회복이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토지도 정부가 일방적으로 개발 여부를 정할 게 하니라 민간이 자율적으로 개발하도록 하되, 정부는 이에 따른 개발이익을 환수해 주거 기반시설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한 가지 정부가 할 일은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이다. 국토연구원 윤주현 연구위원은 "정부가 지원해야 할 계층을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는 민간주택 시장에서 손을 떼고 대신 장기임대주택 건설 등 시장이 해결 못하는 저소득층의 주거안정 문제에 주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혜경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