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10. '꼭지단'과 김혜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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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1989년 '꼭지단' 준비과정에서 사진작가 구본창씨가 찍은 배우 김혜수씨의 멋진 발차기.

지금은 한물갔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홍콩영화의 위력은 대단했다. '어떻게 하면 홍콩영화를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게 그 무렵 나의 화두였다. 그러던 중 김혜수를 만났다.

88년 고3이었던 김혜수는 이규형 감독의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미 CF로 주목받았고 86년 '깜보'로 영화배우로서도 뜨기 시작할 때였다. 제작자로서 더욱 탐났던 것은 그가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배웠다는 점이다. 어느 날 그를 불러 발차기를 시켜보았더니 훤칠한 다리가 자기 키보다 한 뼘은 더 높이 쭉쭉 뻗어 올라갔다.

나는 '됐다' 싶었다. '여자 홍길동'을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홍콩영화처럼 말이다. 그를 즉시 사진작가 구본창씨에게 보내 태권도 자세로 예닐곱장의 사진을 찍어오게 했다.

'어른들은 몰라요'의 조감독은 김영남이었다. 이규형과 한양대 연극영화과 동기였던 그는 인문대 수석을 했을 만큼 실력 있고 됨됨이도 괜찮았다. 덕수상고 졸업 후 은행에 다니다 고학으로 대학에 진학했다는 얘기도 있어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인지 난 어렵게 성장한 후배들을 보면 각별히 정이 갔다.

"영남아, 넌 공부도 잘하고 뚝심도 있으니까 유학을 갔다 와서 교수가 되는 게 어때? 학비랑 생활비는 걱정하지 말고…." 어느 날 이렇게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은 고맙지만 전 꼭 감독을 하고 싶습니다" 라며 사양했다. 아쉽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이제 감독으로 밀어줘야 했다.

그래서 '김영남-김혜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우선 김영남에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지켜주는 여자 의적(꼭지단)을 김혜수로 설정해 시나리오를 쓰라고 했다. 그리고 김혜수의 사진을 들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외화 수입을 하고 있던 때라 홍콩에는 안면 있는 영화 관계자가 몇 사람 있었다.

그때 내가 생각한 방식은 '꼭지단'을 홍콩에서 현지 스태프와 연기자를 동원해 찍어 홍콩영화처럼 만든 다음 거꾸로 수입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감독.주연은 김영남.김혜수였다. 다만 김영남은 홍콩감독처럼 보이기 위해 김남(金男)이나 김용(金勇) 같은 중국식 이름을 만들어 쓸 생각이었다. 편법이지만 홍콩영화라고 하면 무조건 될 때니까 먹힐 것 같았다. 홍콩을 여섯 차례나 드나들면서 협상한 끝에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었다.

득의양양하게 귀국한 다음날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김혜수가 TV드라마에 출연하기로 계약했다는 것이다. 이미 '꼭지단' 출연료도 지급했는데, 뒤통수를 치는 이중 계약이었다. 그때만 해도 배우들이 영화보다 TV를 선호해 더 이상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여자 꼭지단'은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완성된 시나리오를 버릴 수도 없고 김영남에게도 미안해 영화를 찍었다. 그렇게 해서 정보석 주연의 '(남자) 꼭지단'이 탄생한 것이다.

야심(?) 찬 프로젝트는 무산됐지만 나는 뜻하지 않은 '황금알'을 쥐게 된다. 홍콩에 머물 때 한 지인이 "지금 홍콩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그 영화에 완전히 빠졌고 극장문을 나서자마자 수입계약을 했다. 류더화(劉德華).알란 탐 주연의 '지존무상'은 서울에서만 40만명을 모으며 '꼭지단'으로 쓰라렸던 내 속을 쓸어주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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