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나를 자유롭게 해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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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10년만 더 젊었어도….""이 나이에 무슨…."

사람들은 나이를 먹었다는 핑계로 꿈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꿈을 이루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아니, 오히려 넉넉한 나이를 무기 삼아 꿈을 실현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 박강자(61·여)관장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박관장은 최근 애창곡과 신곡 등을 모아 음반 '내 마음의 낙원'(신미디어, CD 및 테이프)을 냈다. 아는 사람끼리 돌려 들으려고 만든 그저그런 기념음반이 아니라 판매를 위해 작심하고 낸 음반이다. 대충 작업했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녹음에만 1년 가까이 매달렸다. 그 앞서 1년 동안은 미술관에 노래 강사를 초빙해 '비공식 노래교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 노력의 결실인지 아홉 곡의 수록곡 가운데 유일한 신곡인 '서귀포의 불빛'(임동춘 작사·오세은 작곡)은 월드컵 개최도시의 하나인 제주의 월드컵 주제곡으로 채택됐다.

가요는 들을 것 같지 않은 '우아한'미술관 관장이 가요음반을 도대체 왜 낸 것일까.박관장은 "이제서야 작게나마 꿈을 이룬 것"이라고 말한다.

박관장은 학교 합창단원으로 활동할 만큼 음악을 좋아해 학창시절엔 늘 레코드판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여러 종류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도 언젠가 음반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

하지만 젊은 시절엔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 딸을 가수로 세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부유한 집안의 딸이라는 점이 첫번째 걸림돌이었다. 박관장은 금호그룹 창업자인 고(故)박인천씨의 5남3녀 중 넷째. 박성룡 금호 명예회장의 친동생이다.

노래에 재능이 있어 중학교 때 음악선생님은 성악 전공을 권유했지만 그러기에는 건강이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꿈을 접고 일생의 대부분을 음악과 관련없는 일을 하며 보냈다. 1989년 금호갤러리(현 금호미술관)관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음악과 미술의 만남 같은 작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관장은 끝내 노래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어 회갑을 넘기고서야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가요음반을 냈다니까 주변에서 더러 실망하는 분들도 있어요. 사실 남의 눈이나 체면을 생각했다면 그럴듯한 클래식 가곡음반을 내는 게 옳았겠지요. 하지만 지금 하고 싶은 걸 못하면 영영 못할 것 같은 생각에 주저없이 애창가요 음반을 냈습니다."

'어느 미술관 관장의 사색과 명상의 꿈'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앨범에는 '숨어 우는 바람소리''잊혀진 계절''추억의 책장을 넘기면'같은 귀에 익은 노래들이 실려 있다. 박관장이 평소 가족·친구들과 함께 즐겨 부르는 노래들이다.

나이 때문에 하고싶은 걸 못하는 실버세대에게 박관장은 "나이가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해주더라"면서 "어르신들이 자식이나 사회통념 때문에 욕망을 꺾기보다 용기를 내서 뭔가 성취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관장은 또 "꿈은 돈이 있다고, 혹은 나이가 젊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 열정이 있어야 한다"면서 "음반이 얼마나 팔릴지는 모르지만 판매 수익금은 불우한 노인분들이 뭔가 열정을 쏟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에 쓰고 싶다"고 덧붙였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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