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5>제101화우리서로섬기며살자:44.방송사도'믿음'운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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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73년 공산권 선교를 목표로 제주도에 아세아방송(현 제주극동방송)을 세운 이후 우리 방송사는 수많은 사람의 헌신으로 운영되고 있다. 애초에는 공산권 선교가 목표였으나 77년 극동방송을 인수한 뒤로는 국내 오지 선교도 겸하게 되었다. 현재 서울 본사와 지방 일곱 곳의 지사가 기독교 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국내 라디오 방송 가운데 가장 강력한 출력인 2백50㎾를 자랑하는 제주극동방송은 중국어·러시아어·일본어·영어로도 방송하고 있다. 가장 주력하는 지역은 중국으로 하루 9시간 45분간 방송한다.

아직도 북한과 중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불법이다. 중국은 18세 이하의 국민은 교회에 다닐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교회는 인정하되 교회 밖의 선교활동을 금하고 외국선교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각국 선교사들은 중국 당국의 눈을 피해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방송사는 방송 송출 외에 중국에 라디오를 보급하는 일에도 주력하고 있다. 라디오 한 대가 선교사, 더 나아가 교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국어 방송은 중국 동포들이 애청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도 제작하고 있다. 북한을 방문한 인사들은 우리 방송사의 한국어 방송이 평양의 호텔에서도 똑똑하게 들린다는 것을 여러 차례 확인해 주었다.

73년 방송을 시작했지만 중국에서의 반응은 76년에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일본 도쿄우체국 사서함 1천호를 거쳐 온 서신에는 방송을 잘 듣고 있다며 성경책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1979년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으면서 편지가 급격히 늘기 시작해 요즘은 매년 2만통이 넘는 서신이 오고 있다. 대개 성경책을 비롯한 신앙관련 물품을 보내달라는 요청이어서 우리 방송사는 가능한 한 모든 요청에 응하고 있다.

현재 8개 방송사에서 광고방송을 하는 곳은 서울 본사 한 곳뿐이며 그것도 기독실업인들의 요청에 의해서 제한적으로 실시하는 중이다. 선교 방송이므로 교인들의 헌금으로 꾸려나가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상업광고를 자제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미국인들의 모금문화와 자원봉사,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모습에서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런 좋은 문화를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우리 방송사에서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활약하고 있으며, 성금이 끊이지 않고 들어온다. 우리 방송사는 이러한 도움에 의해 빚 한푼 없이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금과 자원봉사로 공익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방송사는 오래 전부터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장 귀중한 손길은 방송사로 헌금을 보내주는 이들이다. 그들을 우리는 전파선교사라고 부른다. 1분 방송하는 비용을 1만원으로 책정하여 전파선교사를 모집하고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전파선교사로 가입하여 1분, 5분, 10분씩 방송을 책임지고 있다.

우리 방송사에 거액을 희사하거나 무상으로 편의를 제공한 분들도 많이 있다. 선교방송을 시작할 당시 미국 본사가 우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방송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으나 여의치 않아 서울의 뉴코리아호텔 방 하나를 빌려 사무실로도 쓰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공간으로도 썼다. 그러다가 정동 CCC 빌딩 7층의 방 하나를 얻어 옮겼으나 장소가 협소한 데다 엘리베이터조차 없어 여러모로 불편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가 끝난 뒤인 74년에 한양대학교 김연준 총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내가 통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방송사 공간이 좁아 불편하다고 하자 선뜻 덕수궁 앞에 있던 대한일보 건물 2층을 무상으로 사용하라고 내주었다. 이후 김연준 총장은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가서 민간외교를 펼쳤다. 민간외교의 일환으로 카터 대통령 어머니 릴리안 여사를 비롯하여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기독교계 주요인사들에게 한양대학교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그때 뿌려놓은 씨앗이 오늘날 내가 침례교세계총회장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비싼 빌딩의 건물을 무상으로 사용하니 나는 몸으로 뛰는 수밖에 없다. 당시 이대교회를 다니고 있던 김연준 총장에게 우리 교회로 나오시라고 권했다. 김총장은 74년부터 89년까지 15년 동안 매주일 서울에서 수원의 우리 교회로 출석했다. 총장님이 오시면 아내가 정성껏 점심을 마련하여 대접했다. 나는 김연준 총장의 자제분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섰고, 지금까지 한양대학교 교목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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