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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축구와 관중심리 - 응원하는 팀을 통해 연대의식 느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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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필자가 1995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지 며칠 후 리베르 플라테와 보카 후니오르스 간의 축구경기가 벌어졌다. 이 클럽들은 전통적인 라이벌로 경기는 마치 전쟁같았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축구장은 하얀색·붉은색의 리베르 깃발과 파란색·노란색의 보카 깃발이 휘날리며 금세 열광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관중석에서 우박처럼 떨어지는 흰색 종이조각들, 천둥소리를 연상시키는 연막탄,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괴성 등. 리베르와 보카의 '축구전쟁'을 본 사람은 그 열정적 모습이 어떠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축구는 이렇게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든다. 왜 그런가. 무엇보다 축구경기 자체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마라도나의 마술같은 드리블을 느린 화면으로 따라가면 그리스의 조각품과 같은 몸의 놀라운 균형과 조화, 그리고 기하학적 비례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축구경기는 이러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넘어 원초적인 공격성과 관능성에 관한 수많은 어휘들을 생산한다.

어깨와 어깨의 충돌에서 표현되는 힘, 공을 빼앗으려는 투지,끈질긴 태클, 스피드와 지구력 등에서 확인되는 처절한 몸짓, 허벅지의 빛나는 동선(動線)과 춤추듯 요동치는 엉덩이의 움직임, 그리고 상하좌우로 젖혀지고 흔들리는 상체의 선정적 움직임 등.이 모든 것은 축구경기를 훌륭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매순간 포착된 역동적 이미지 속에서 성애적(性愛的) 충동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축구는 강인함과 헌신,고통스러운 인내와 생명력,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삶에서 추구하는 모든 '영웅적' 가치의 특권화된 상징으로서 남성의 몸을 신비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비화, 즉 성애적 충동의 표현은 마음의 상처로 엉킨 일상생활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낭만적이고 무당파적(無黨派的)인 방식으로 이끌리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사회적 차원에서 관중의 시선을 통해 '우리'와 '적'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해 서로를 대립시키는 당파주의적 열정으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관중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이 승리하기를 소망하면서 그 팀이 대표하는 지역이나 민족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들기' 방식으로 당파주의적 열정은 관중의 정신에 저장되고 사회세계로 표출되게 마련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열정이 일차적으로 사랑받거나 또는 증오받는 대상으로 그 무엇을 표현하든 간에, 그 열정을 형성시키는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승자의 기쁨과 패자의 고통을 넘어 당파주의적 열정은 축구행위(단순한 관람이든 아니면 직접 운동이든 간에)를 조직화하는 형식적 기초를 마련한다. 지역 또는 민족에 대한 이미지와 '이중의 터부'(핸들링 금지와 걷어차기 금지)를 규칙화한 축구에 대한 이미지를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주장하듯이 종교를 사회 그 자체의 '신성함'의 이미지에 투사된 권력으로 이해한다면, 축구는 지역 또는 민족에 대한 경외를 중심으로 성립된 종교의 세속화된 등가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따라서 축구와 관련된 모든 영예(榮譽)는 우리에게 문명화의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능력에 따라 부각되거나 사라진다. 또한 그 영예는 우리가 공격적인 힘을 산출하고 행사하게끔 하고,그 힘의 원천에서만 표현될 수 있는 추상적 권위를 포괄적으로 제공한다.

이것은 경기에서 승리하거나 또는 패배할지라도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찬양되는 지역 또는 민족에 대한 '이상화'다. 이상화는 그 대상이 현실세계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깨지기 쉽고 방어적이다. 아마 축구의 이상화된 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벽이 두꺼울 때, 즉 우리가 정치로부터 축구를 지키려고 할 때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병리는 흔히 이상화하려는 충동이 현실세계에 종속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이 병리를 극복하려면 우리 자신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현실세계에 대한 이해와 그 세계에 맞서는 것에서 만족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축구문화는 사회갈등을 파헤치기보다 오히려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사회갈등에 순응하게 함으로써 그러한 이상화의 경향을 부추긴다. 예를 들어 유럽과 남미의,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축구해설자들은 종종 지역적 또는 민족적 차별주의를 조장하는 혐오스러운 말을 구사한다.

따라서 당파주의적 열정은 축구가 자기지역 또는 자기민족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열정이 응원하는 관중과 경기하는 선수들을 매개하는 당파적 동일시의 도구가 된 셈이고, 이 때 축구행위는 지역 또는 민족의 특별한 '하나됨'을 옹호하기 위해 각종 강박적 태도를 합리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결국 축구는 원초적 공격성 또는 성애적 충동을 사회적으로 승화시키는 강력한 '자아정체성'의 매체(일종의 문화형태)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전세계의 프로축구는 지역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환상적인 이상화 속에서 엄청나게 발전해 왔으며, 이를 위해 선수들이나 관중에게 지역 또는 민족에 고도로 애착하는 감정적 연대의식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관중과 그들이 응원하는 팀 사이의 당파적인 동일시가 항상 지역 또는 민족에 대한 이상화의 맥락에 의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역 또는 민족공동체는 재정립되고 당파주의적인 열정은 문명화된다.

하지만 이상화는 그 방어적인 속성상 지역 또는 민족마다 그 유형이 서로 다를 것이고, 그것의 사회적 의미도 이상화 대상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월드컵의 해를 맞이해 우리 사회에서 축구가 건설적이고 조화로운 사회통합의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항간의 통념은 당파주의적 열정이 매개한 이상화의 경향을 '포용하는' 방향에서 축구 이미지를 건강하게 재생산하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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