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구했다. 민국(民國) 시절, 상가로 임대된다. 수익금은 ‘대만여평동향(旅平同鄕)회’, 즉 대만여행협회의 활동자금으로 쓰인다. 1949년 민가가 된다. 그해 장제스(蔣介石)가 대만으로 퇴각하고, 대륙엔 공산 중국이 섰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시 대만회관이 된 건 1993년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대만 기념관이 된다. 1996년 100주년 행사를 열었다.
옛날 건물이니 회관은 협소했다. 교통도 불편하다. 시설도 낡았다. 날로 늘어가는 양안(兩岸) 교류를 소화하기엔 턱도 없다. 때마침 2005년 충원구청이 천안문(天安門) 뒤 첸먼(前門) 지역을 보수한다. 그 덕에 대만회관도 일신한다. 2009년 6월 24일 운간(雲間)회관, 복덕선림(福德禪林)이 더해지고, 아름다운 사합원을 거느린 새 회관이 탄생한다. 면적도 1300㎡(400평)에서 1만2500㎡(3800평)로 늘었다.
규모보다 중요한 건 색채다. 대만풍이 물씬 풍긴다. 문은 대만 특색의 마조묘(<5ABD>祖廟)다. 회관 안으로 들어서면 대만 토속곡 ‘아리산 구냥’(阿里山姑娘)이 흘러나온다. 맑은 물 흐르는 석판, 대들보에 걸린 홍등, 정교한 헝겊 인형, 빛나는 유정석(流晶石)…, 베이징과 대만의 맛을 절묘하게 버무린 디자인이다. 건물 밖엔 대만 루강(鹿港)의 옛 거리가 화폭으로 걸렸다. 절로 대만이다.
양안관계도 남북관계 못지않게 부침이 심했다. 2000년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취임 후 8년간은 최악이었다. 그래도 대만회관은 건재했다. 실용이 이념을 누른 결과다. 그 열매가 ‘차이완 시대’다. 양안끼리 무관세 혜택을 주는 경제협력기본협정(ECFA), 즉 양안 FTA가 29일 출범했다. 중국이 대만 경제를 품었다. 양안 모두 행복이다.
우린 어떤가. 한쪽은 보복이요 징계고, 또 한쪽은 전면전 으름장이다. 다툼은 그렇다 치자. 그래도 대만회관 같은, ‘북한회관’ 하나쯤은 두자. 그래야 희망을 걸 수 있다.
진세근 탐사 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