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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⑦ 쌍용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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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태우 기자
사진= 조영회 기자

서민·중산층 어우러진 동네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쌍용동. 최근 아산신도시 개발과 수도권전철 개통으로 최적의 주거여건을 자랑하는 천안의 대표 주거지역이다.

“메론 사세요~ 수박만한 메론이 있어요~” 후텁지근한 25일 오후 쌍용3동주민센터 앞에서 ‘불우이웃 돕기 메론 판매 행사’가 열렸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을 돕기 위해 쌍용3동 바르게살기운동본부 주민들이 나섰다. 한동네 주민에게 인사를 건네며 행사 취지를 설명하자 수북이 쌓인 상자가 어느 새 바닥을 드러냈다. "동네 주민끼리 서로 도와가며 살자”는 인식이 자리잡은 곳이다. 수익금은 올 연말 동네 노인정과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주민들을 위한 장학금과 생활필수품 구입비로 사용된다. 쌍용동은 서민과 중산층이 함께 모여 사는 동네다. 쌍용동은 1995년 2월 20일 쌍봉동이 쌍용동과 봉명동으로 분동하면서 생겼다. 쌍용동에는 수많은 아파트 단지가 밀집해 있다. 쌍용1동에는 일성1·2차·현대1·3차·극동 아파트, 쌍용2동에는 월봉 청솔·태영·대우·일성2·3차·쌍용해누리·모란·일성능수·다래 아파트, 쌍용3동에는 주공7·9·10·용암마을·라이프타운 아파트 등이 있다. 대부분 10년을 넘긴 단지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지기 이웃간의 정이 두터울 수 밖에 없다.

서부지역 중심지 부상

쌍용동은 90년대 중반 택지개발로 전체가 도시화되면서 천안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주거형태의 90%가 아파트와 빌라로 구성돼 있고 상가들이 밀집한 소비 중심지다. 쌍용1동은 1996년 쌍용1, 2동으로 분리됐다. 주택의 85%가 아파트다. 쌍용대로와 서부대로가 동서로 지나고, 남북과 동서를 연결해 주는 충무로가 있다. 교통의 요충지다. 쌍용1동에는 패션특화거리가 유명하다. 두정동과 불당동 등 신도심 상권과 차별화시켜 많은 시민이 찾고 있다. 특화거리 안쪽 골목에는 600여 개의 상가가 모여 있다. 서부지역 대표 상권이다.

쌍용2동은 2003년 8월 11일 쌍용2, 3동으로 나뉘면서 생겼다. KTX(고속철도) 역세권에 인접해 있다. 여기에 수도권전철(쌍용역나사렛대역)이 지나가면서 주거지역으로 인기가 높다. 아파트 단지에는 대형마트가 있다. 이 일대는 아파트 전세를 찾기가 쉽지 않다. 쌍용3동은 학원 밀집가다. 좁은 지역에도 불구하고 천안에서 가장 많은 학원이 몰려있다. 100여 곳에 이르는 학원이 상가마다 자리를 잡았다. 주민 95%가 아파트에 거주하는 단위면적당 인구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도심 속 쾌적한 휴식공간

쌍용동에는 도심 속 쉼터가 많다. 쌍용2동 월봉현대아파트 뒤편의 월봉산은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른 아침과 저녁은 직장인, 오전·오후에는 주부들의 산책 코스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산길주변은 나무와 새소리로 도심 속 작은 정원과 같다. 고라니가 발견된 적도 있다.

쌍용2동에 월봉산이 있다면, 쌍용3동과 불당동 경계에는 봉서산이 있다. 쌍용3동의 절반을 차지한다. 낮은 산이지만 등산로 초입부터 맑은 새소리와 빽빽하게 뻗어있는 나무숲이 장관이다. 도심 속에서 숲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쌍용동에는 대학을 비롯해 공원도 잘 꾸며져 있다. 쌍용1동에는 쌍용공원이 있다. 정자, 원형 그늘막, 산책로(700m), 지압보도 등 멋과 실용성을 살린 시설을 갖췄다. 쌍용2동에는 나사렛대학교가 자리한다. 주민과 가깝게 교류하는 도심 속 대학이다. 나사렛대 앞에는 방아다리공원이 있다. 순환산책로(444m), 인도잔디 구장, 인라인스케이트장, 어린이 놀이시설이 있다. 늘 주민들로 북적인다.

주민학습 프로그램 활발

쌍용1동 주민자치센터 교육생들이 25일 천안컨벤션센터에서 작품발표회를 가졌다. 요가, 스포츠댄스, 밸리댄스, 방송댄스, 노래 합창, 영어시 낭독 등의 공연이 이어졌다. 쌍용동은 천안에서 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이다. 분기별로 12개 강좌에 300여 명의 주민이 이용하고 있다. 쌍용2동 주민자치센터는 주로 가정주부들의 여가 시간을 책임지고 있다. 9개 과목 12개 프로그램을 운영, 분기마다 300여 명이 이용하고 있다. 쌍용3동 주민자치센터도 댄스스포츠, 사물놀이 등 16개 과목 25개 반을 운영하고 있다. 35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하고 있다.



쌍용동 토박이 안희경씨

장항철교 아래 냇가서 고기잡던 정 많은 시골동네

안희경(57·사진)씨 가정은 할아버지 때부터 3대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6·25전쟁 때문에 잠시 피난한 것을 제외하고는 동네를 떠나 본적이 없다. 이웃과 한 평생 울고 웃으며 살아왔다. 10년 전부터 동네가 개발되면서 수많은 아파트가 들어와 많은 이웃이 생겼다. 하지만 도시가 개발되기 전 시골동네가 그립다고 말한다. 안씨에게 쌍용동의 얘기를 들어봤다.

Q 쌍용동은 어떤 곳이었나.

수많은 아파트 단지가 모여 있는 쌍용동이지만 예전에만 해도 아파트가 없었다. 산과 논, 밭 과수원이 전부였다. 아산에서 서울로 가려면 꼭 거쳐가야 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지금은 쌍용지하차도와 쌍용대로가 있지만 당시에는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아산방면으로 쌍용지하차도를 지나면 작은 오르막길이 있다. 운전자들은 별다른 느낌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그 고갯길을 차량이 넘어가려면 고생을 많이 했다. 그 길을 차돌고개라 불렀다. 트럭 한대가 짐을 싣고 서울로 가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대부분의 차량이 어른이 걸어가는 속도보다 느렸다. 그만큼 차돌고개를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배고프던 시절 각종 채소를 싣고 올라가는 차량 뒤에서 몰래 채소를 빼돌려 배를 채웠던 추억이 생각난다.

Q 당시 주민들은 어떻게 살았나.

차돌고개에 주변에 사는 쌍용동 주민들은 다른 지역보다 성격이 좀 억셌다. 어느 동네건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길목에는 텃세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온순하고 양보심이 많았다. 콩죽을 쒀 나눠먹고 빈대떡을 부쳐 집집마다 돌리는 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결속력도 높아 지금도 동창회 등 각종 모임을 하면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주민이 많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잠시 광덕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뒤로는 동네를 떠나 본적이 없다. 주민들은 논·밭·과수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농민들이었다. 농토가 드넓게 펼쳐지지 않아 층층 계단형의 논이 많았다. 땅이 경사지고 주위에 낮은 산이 많아 과수농사도 많이 했다.

Q 기억에 남는 추억은.

지금의 쌍용지하차도 자리 옆에 냇가가 있었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덮혔지만 당시만해도 여름이면 깨끗한 물가에서 미꾸라지와 붕어 등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고기를 잡다가 기차가 지나가면 손을 흔들어 주던 기억이 아련하다. 물탕거리도 기억난다. 물이 마르지 않은 곳인데 어머니들의 빨래터로 사용됐다. 일제가 온천개발을 하려다 실패했다고 한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1989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구획정리 사업이 시작되면서 동네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쌍용지하차도가 생겼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당시 과수원이었던 자리에 현재의 광명아파트와 일성아파트가 제일 먼저 들어선 것으로 기억한다.



쌍용동 유래

우물과 냇가 있는 아담한 청정마을

2007년 11월 서부대로 개통과 함께 들어선 쌍용공원. 오른쪽은 쌍용1동에 조성된 패션특화거리 전경

본래 천안군 군서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미라리(彌羅里), 쌍정리(雙井里), 용암리(龍岩里)를 합해 쌍정(雙井)과 용암(龍岩)의 머릿자를 따서 쌍용리가 됐다. 천안군 환성면에 속했으나 1963년 천안시에 편입됐다. 최근에는 마을이 도시화 돼 농촌의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미라골(彌羅谷:미륵골) 중군산(中軍山) 밑에 형성된 마을이다. 동리의 북동쪽에 건립연대가 확실치 않은 사찰지가 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이 사찰 이름이 미륵사라 마을 이름을 미라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쌍용동에서는 가장 큰 마을로 마을의 반수가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집촌이다.

미륵불(彌勒佛) 미라골 동리입구 길가에 있다. 높이 1.4m의 자연석으로 흡사 석불을 닮았다. 언제 누가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선사시대에 사람들이 집단 정착하던 곳에 세워진 선돌(石)이다. 마을과 마을은 경계를 표시하였고 때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대개 이와 같은 선돌이 서 있는 곳은 ‘선돌말’이라고 한다. 미륵불은 지금의 보호각을 만들어 마을에서 잘 보전하고 있으며 봄 가을로 마을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방축골(방죽골) 중군봉 남쪽 기슭에 발달된 취락마을이다. 방죽골이 변해서 방축골이 되었다. 마을 뒤에 큰 방죽이 있어 방죽골이다. 마을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적을 막기 위하여 축을 쌓았다고 하여 방축골이라고 하나 정확치 않다.

갱지산 방축골앞 장군바위가 있는 산. 본래 강씨의 소유라 강가산이 변해서 갱지산이 되었다.

쪽샘(藍井) 방축골 마을 앞에 있는 우물. 우물이 맑고 많아서 하늘이 우물에 비추면 짙은 남색(쪽빛)으로 보여 쪽샘이라고 한다. 지금도 정월의 첫 번째 용날(辰日)이 되면 쪽샘에 용왕제(龍祭)를 지내고 있다. 1989년 천안시에서 전통민속으로 지정하였다.

냉천(冷泉:물탕거리) 아산으로 가는 큰길에서 방축골로 들어가는 길가 삼일육아원 못미처 있다. 물이 차고 많아서 냉천이라고 하였으며 옷(漆)을 올린 사람들이 목욕하면 깨끗하게 낳는다고 옷샘으로도 불리우며 피부병에 고생하는 사람도 이 우물에 세 번만 몸을 닦으면 낫는다고 한다. 해가지면 목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물탕거리라고 하였다.

방아다리 나사렛대학교 아랫마을이다. 이 마을은 최근 50여 년 전부터 형성됐다. 원래 방아다리는 철길 옆이다. 이 마을 앞에 옛날에 큰 연자방아가 두 곳이 있었고 디딜방아가 두 곳이 있었다. 마을 앞에 작은 냇가가 있어 다리를 넘어서 방아를 찧으러 갔다고 방아다리라고 하였다. 다른 설에 의하면 마을의 모습이 디딜방아의 다리와 같이 꼬부라져 있다고 방아다리라고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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