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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천사'가 일깨운 오 ! 생명과 사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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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태어남과 다시 태어남, 그리고 일상의 신비에 관한 이야기'란 부제가 붙은 『아담을 기다리며』(원제 Expecting Adam)는 태아가 다운증후군이란 정신지체증임을 알고도 낳아 기른 미국 엘리트 부부의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하고 만다면 이 책 표지에 실린 미국 칼럼니스트의 말마따나 톨스토이 작품 『안나 카레니나』를 사랑 때문에 자살한 어느 여자에 관한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따라서 그런 표피적 정보만으로는 국내의 비타협적 생태주의 저널 『녹색평론』을 펴내는 녹색평론사의 새 단행본이란 사실에 고개가 갸우뚱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영문학·영남대)교수의 머리말에 귀기울여 보자. 이 책이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 여사의 스테디셀러인 『오래된 미래』 등 녹색평론사의 다른 책들과 연장선상에 있음이 명쾌해진다.

"무지의 세계에서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회상록을 통해 우리는 진실한 인간 기록만이 베풀어줄 수 있는 깊은 고양감(高揚感)을 느낀다. 인공지능이니 생명공학이니 하는 첨단기술이 이른바 '인간의 개조'와 '질병 없는 세상'을 운위하는 이 불경(敬)의 시대에, 『아담을 기다리며』는 인간이 이 세계에서 산다는 게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이 엘리트 부부가 사는 법

즉 '하버드대 학위를 세개나 가지고 있는' 저자 마사 베크는 오늘날 하버드로 대변되는 이른바 엘리트 세계의 숨겨진 불모성과 비인간성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아담'이라는 특별한 아이(저자의 반복되는 표현이다)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면서 저자 스스로 벗어던진 '정상적인' 지성인들의 자기중심적인 삶을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까지 더해져 이 책은 생명이라는 기적과 진정한 모성·가족을 되새겨보게 만드는 가정의 달 5월의 고급 읽을거리로 지목할 만하다.

1987년 당시 각각 아시아학, 성(性) 사회학 박사과정에 있던 존과 마사 부부는 '아이비리그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지역'인 서부 유타주 공립학교 출신이라는 '더러운 과거, 성공을 향한 맹렬한 추진력, 체제에 맞아들어가려는 갈망'등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학점을 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심정을 서로 겨우 털어놓았을 때 '섹스보다 더 친밀한' 결속감을 느꼈을 만큼 남들 앞에선 자신감으로 철저히 위장한 하버드맨이었다. 그 때 마사가 덜컥 둘째 아이를 임신한다.

존은 첫 아이 출산 때 마사의 라마즈 호흡을 도와주러 병원에 갔다가 강의를 하루 빠지는 바람에 다른 학생들 앞에서 경제학 교수에게서 "자네는 우리 학교의 수치야"라는 비난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마사 역시 아이를 낳은 지 여섯시간 만에 일어나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 서류를 완성해 교수에게 제출하러 간 경험이 있다. 그런 그들에게 또 아이를 낳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논문 담당 교수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낙태를 권유한다. 하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이끌림 속에 출산을 결심한다.

심한 구토와 현기증 등을 견뎌 가던 마사는, 그러나 태아가 다운증후군인 것 같다는 진단을 받자 또 한번 절망에 빠진다. "내 아들의 IQ가 내 형제들의 평균 IQ보다 1백30점 정도 낮고 하버드 교정의 나무보다 겨우 32점 높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임신 중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에 불이 났을 때 첫 딸을 안고 탈출하던 순간 그를 잡아주었던 보이지 않는 힘센 남자 손길을 느끼는 등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들을 겪으면서 마사는 서서히 변화한다. 자신을 싸고 있던 껍질을 벗는 것이다.

다운증후군 아이 출산·양육

"그때까지는 진실이라고 증명되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적인 논리를 따르고 있었다. 이제 나는 무엇이든 내가 듣고 보고 느낀 것을 그것이 거짓이라고 증명되지 않는 한 기꺼이 믿겠다고 결심했다. 이 하나의 결정으로 나는 나의 현실을 확고한 사실들로 이루어진 면도칼의 날처럼 좁고 강하고 차가운 줄로부터 거칠고 혼돈스러운 가능성을 향하여 넓혔다."(1백81쪽)

영매·심령술사 등에 관한 이야기들도 언급되지만 이 책이 리얼리티를 잃지 않는 것은 저자의 솔직함과 진정성 때문이다. "나는 임신중절이니 유전공학, 의료윤리 등의 논란에 휩싸일까 두렵다. 나는 세도나의 구름에서 천사를 봤다고 주장하는 뉴에이지 점쟁이는 말할 것도 없고 낙태 반대론자들과 한덩어리로 치부될 것도 걱정이 된다. 나는 이성주의자로서의 신용을 잃어버리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물러나지 않고 나에게 그것을 세상을 향해 말하라고 계속 요구할 것이다."(14쪽)

결국 그들은 88년 아담을 낳았고, 케임브리지를 떠나 애리조나주의 피닉스에 정착했다. 이 책이 현지에서 출간된 99년 현재 마사는 카운슬러이자 마드모아젤지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소중한 삶은 과연 무엇

"권력·부·지위·영향력 등은 그(아담)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늘 그런 것을 탐냈다. 그러한 것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바로 행복을 향해 간다. 우회로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아담이 태어난 뒤로 나는 때때로 사회적 순응주의를 무시하고,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그런 식으로 살려고 했다."(3백31쪽)

'아담 식 세상보기'는 그가 일곱살이 됐을 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잘 나타난다. 누나와 여동생이 선물을 뜯어보고 사소한 이유로 실망한 표정을 지은 것과 달리, 진짜 선물인 장난감총 대신 그 부속물인 건전지 꾸러미를 먼저 풀어본 아담은 환호한다. 놀라움과 기쁨에 찬 채 집안을 뛰어다니며 건전지로 움직일 수 있는 온갖 물건을 찾아내며 재잘대는 그를 지켜보면서 "우리 '정상적인' 사람들은 모두 건전지가 정말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2백2쪽)

과연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아름다운 것일까. 눈에 보이고 경험하는 세계에 매몰돼 살아가는 정상적인 '문명인'들의 허상이 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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