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정우 칼럼] 개성 냄비와 주미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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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서울에 첫선을 보여 이틀 만에 매진된 '개성 냄비'는 남북경협의 상징이다. 적어도 2~3년 앞당길 수 있었던 일이 늦춰진 배경에는 북한 핵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개성공단의 가동 지연에 북측 불만이 있다손 치더라도 책임은 다분히 북한에 있다.

공단 건설에 합의한 뒤 4년 만의 일이지만 일단 제품생산이 시작된 만큼 절대 중단돼선 안 된다. 잠시라도 중단될 경우 공단에 참여한 중소업체들의 경제적 타산성에 직접 영향을 주고 복원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개성공단 가동은 이미 경협의 상징성을 넘어섰다. 작은 문제라도 남북관계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다. 북한붕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남측의 기능적 대북접근이 가능해지려면 경협 전선에 이상이 생겨선 안 된다. 핵문제처럼 한국을 가급적 배제하고 국제사회를 상대했던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북측은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남북 간의 경제협력이 북한을 보는 미국의 시각과 대량살상무기, 그리고 인권상황에 이르기까지 워싱턴과 미국 조야의 인식에 이래저래 영향받게 돼있다는 데 있다. 다행스럽게도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가 워싱턴 방문 길에 한 연설에서 개성공단 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원론적 수준이고 미 정부도 현 단계에서 남북교류를 망칠 의사는 없다. 한마디로 북핵문제 진척에 따라 입장을 정하겠다는 게 미국 측의 생각이다.

한국의 고민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포기를 위한 외교적 노력과 함께 한반도 비(非)핵화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진 미국과 그 방법론에서 편차를 줄여가는 데 있다. 신임 주미대사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임무 역시 여기에 있다. 정부도 주목하고 있는 미국의 여론주도층이 우리 정부의 대북접근법에 공감토록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체제와 지도자에 대한 그들의 인식에 변화가 없다면 북한 다루기에 간격 줄이기는 힘들다. 북한이란 매우 독특한 실체, 미국의 동맹이자 북한의 동족인 한국이 북한생존의 마지막 보루가 돼 있는 구조적 특성에 대한 미 측의 이해가 없는 한 어떤 노력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한국이 기대하는 좀 더 대범한 대북접근법을 수용할 워싱턴의 정치적 의지가 없다면 신임대사 역시 전임자들의 벽을 넘기 어렵다.

주미대사에게 거는 우리의 기대가 현실로 나타나려면 적어도 세 가지가 충족돼야 한다. 우선 우리 지도자의 절대적 신임이다. 다양한 입장을 가진 미국 여론지도층을 상대로 개진할 설득논리에 유연성을 보장해야 한다. 때론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도 불가피하고 우리 정부의 거북스러운 자세를 겨냥한 언급도 전술적으론 필요하다.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용인이 필요하다.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해서.

미국 역시 기존의 원론적 접근법에 현실적 유연성을 보태야 한다. 지역적 특성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마냥 미룰 수 없는 북핵 해결에 한국이 마련한 창의적 구상을 시험해 볼 수 있다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또 남다른 경륜을 갖춘 신임대사를 활용해 미국의 전략목표를 실현해 보겠다는 실험정신이 필요하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측도 자신들에 대한 이해가 깊은 주미대사 선임을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미대사란 자리가 정책결정자라기보다 메신저의 성격이 강하다곤 하지만 그의 워싱턴 업무수행이 남북 모두의 '윈-윈'상황으로 이어지기 위해 평양도 남측의 신임 주미대사에게 무게를 실어줘야 한다.

개성 냄비의 서울 진입이 한반도의 긍정적 장래에 예고편이라면 신임 주미대사의 워싱턴 입성이 개성 냄비의 대박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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