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5>제101화우리서로섬기며살자:24. 공부에 가속도 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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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선생님들은 방과후에 돌아가면서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다. 나도 마음을 다잡고 특별 수업에 매달렸다. 말을 못해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었으니 방과 후 시간은 온전히 영어 공부에 쏟을 수 있었다. 나와 방을 함께 쓴 제리 톰슨이라는 대학생도 적극적으로 나의 공부를 도와주었다. 아주 조금씩 영어 실력이 나아졌으나 여전히 나는 수업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힘들게 첫 학기를 마치고 시험을 봤으나 예상대로 전과목이 F였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다면서 모든 과목을 D로 올려 주어 낙제를 면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버지니아주 칼 파워스씨의 집으로 가자 가족들이 모두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낙제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파워스씨 집에서 석달 동안 방학을 보내면서 그가 어려운 형편에도 나를 공부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파워스씨도 사범대학에 진학했는데 군인 장학금으로 둘이 공부하기는 힘들었다. 코카콜라 한병에 5센트하던 그 시절에 일년에 내가 내야 할 학비가 7백30달러나 됐다. 나는 버지니아주 공립학교로 옮기면 돈이 안 든다는 사실을 알고 파워스씨에게 2학기 때는 공립학교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학비 걱정은 마, 이 형이 마련할 테니까. 넌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대신 여름방학도 헛되이 보내면 안되니까 여기 공립학교 서머 스쿨에 몇 과목을 신청해. 여기서 딴 학점도 인정되니까. 빨리 공부를 마치고 어머니께 돌아가 한국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해야 할 것 아닌가."

파워스씨는 나를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켜 귀국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다. 나로서는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그에게 은혜를 갚는 길이었다.

방학이 끝나고 9월에 나는 바로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한 학기를 마칠 때쯤 나는 웬만한 책은 읽고 이해할 정도가 되었다.

방과 후에 학교에서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축구를 비롯한 운동경기가 있었고 각종 이벤트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밖에서 노는 아이들과 영어실력이 같아질 때까지 절대 놀지 않기로 결심했다. 선생님들도 그런 나를 더욱 열심히 가르쳤다.

나는 공부가 힘들 때나 울적할 때면 최선을 다하면 길이 열리는 법이라고 나를 달래곤 했다. 고등학교 1학기 말 시험 시간 때였다. 답은 분명히 수에즈 운하인데 철자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 억울해 조용히 선생님 책상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저는 이 문제의 답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음, 답을 내 귀에다 살짝 말해 봐. 그 답이 맞으면 철자를 가르쳐 주겠다."

내가 선생님의 귀에다 수에즈 운하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철자(Suez Canal)를 가르쳐 주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눈과 귀가 밝아져갔다 그에 따른 환희도 대단했다. 하지만 여전히 친구들에게 마음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저 친구들이 얘기하면 듣고 다 이해하지 못해도 웃어주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중 내가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게시판에 전국 고등학생 웅변대회가 열린다는 공고가 붙었다. 전국대회에서 1등을 하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상과 부상으로 TV수상기를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공고문을 읽으면서 1등을 해서 칼 파워스씨에게 TV 수상기를 선물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웅변담당인 유니스 리스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저 웅변대회 나가고 싶은데, 제가 나갈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네가 처음 우리 학교에 왔을 땐 말을 한마디도 못했는데, 지금은 어떻니? 네 의사를 표현하고 있잖아. 웅변 원고를 써와. 우선 원고가 통과되어야 대회에 나갈 수 있단다."

한국 전쟁 때 하우스보이로 일하면서 느낀 점을 쓴 내 원고는 쉽게 통과되었다. 미군들이 다른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치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밝힌 글이었다. 유니스 리스 선생님은 원고 내용에 크게 만족하면서 나를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발음이었다. 특히 R과 L 발음이 잘 안되었다. 나는 입에 구슬을 물고 하루에 몇시간씩 연습했다. 입에서 피가 날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 때 내 목표는 일단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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