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TV코미디'의 현주소 :"쇼·드라마가 더 웃겨" 정통코미디는 썰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KBS 2TV '개그 콘서트'(일요일 밤 8시50분)의 인기 바람이 멈출 줄 모른다. 평균 시청률 23~25%로, 같은 시간대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들을 가뿐히 제쳤다. 그럼 과연 한국 방송 코미디의 전성기가 도래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선뜻 그렇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개그 콘서트'의 성공담 못지 않게 '코미디 붕괴론'을 주장하는 목소리 또한 높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한 장르에 묶여 있던 TV 코미디가 분화하면서 그 지류(支流)는 풍부해졌지만, 정작 '엄밀한 의미에서의' 코미디 본류(本流)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2002년, TV 코미디가 달라졌다

지난 15일 밤 KBS 별관 공개홀. 매번 표 구하기 전쟁이 벌어진다는 '개그 콘서트' 녹화 현장이다. 두 시간 가량 진행된 녹화에선 굳이 무대와 객석의 구별이 필요없었다. 청중들은 출연진의 몸짓과 대사를 따라하며 현장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1970~80년대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객석'을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개그'와 '콘서트'의 절묘한 결합에서 볼 수 있듯이, 요즘의 코미디(개그)에선 역동적인 '현장감'을 빼 놓을 수 없다.

객석보다 높았던 무대의 위치가 낮아졌고, 거리도 좁혀졌다. 대형 스테이지와 색색의 조명, 강렬한 비트의 음악이 그 뒤를 받친다. 숨 돌릴 새 없이 이어지는 스피디한 진행. 개그맨 스스로 만든 대본의 독창성. 그리고 위트 넘치는 현장 애드리브. 이런 '생생함'은 TV 앞에 앉아 있는 시청자들에게도 똑같은 흡인력으로 작용한다.

'짧고 빠르고 반복되게-'가 요즘 코미디의 모토라고 지적하는 KBS 김웅래 PD는 "최근의 코미디는 특정 코드를 하나 개발한 뒤, 이를 반복·확대 재생산하는 특징이 있다"고 분석한다. 예전처럼 생산자가 따로 있고 그들의 생산물(유행어)을 대중으로 하여금 단순히 따라하게 하는 차원을 넘어, 끊임없이 '나만의 버전'(옌볜총각이나 운동권 학생 같은)을 만들어 내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코미디가 낳은 자식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코미디는 쇼·드라마, 기타 오락 프로그램들과 성격이 명확히 구분됐다. 그러나 이 양상은 시트콤이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한 90년대 들어 무너진다. 방송사별로 1~2개씩의 시트콤이 경쟁적으로 만들어지면서, 코미디의 희극적 요소들이 그 안에 자연스럽게 흡수됐다.

90년대 중반 방영된 MBC '테마게임'과 같은 드라마 장르에도 개그맨들이 대거 출연하면서 코미디적 양념이 뿌려졌다. 또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서세원 쇼'와 같은 토크쇼 역시 입담 좋은 연예인들의 '개인기' 경연장으로 자리잡았다.

'해피 투게더''야!한밤에'(KBS),'좋은 친구들''류시원 황현정의 나우'(SBS),'느낌표'(MBC)…. 현재 방영 중인 방송사의 오락 프로그램들도 '웃음'의 코드를 앞세운다. 그리고 대부분 진행을 개그맨들이 맡고 있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는 "'장르 간 엄격한 분리'라는 제방이 무너지면서 70~80년대 코미디의 원류가 다양한 장르로 흘러 들어갔다"며 "방송 코미디는 죽은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더욱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고 말했다.

'정통 코미디'는 배고프다

하지만 코미디계에선 '개그 콘서트'의 인기는 이례적인 것일 뿐 코미디 장르가 죽어가고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현재 KBS·MBC·SBS에서 방송되고 있는 순수 코미디 프로그램은 '개그 콘서트'와 MBC의 '코미디 하우스'(토요일 오후 5시 10분), 단 두 개. 90년대 중반까지 방송사마다 2~3개씩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방송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통 코미디가 줄어든 것은 힘든 제작 여건에 비해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코미디 하우스'의 경우 시청률 10%를 겨우 턱걸이할 정도다. 80년대 대부분의 코미디 프로들이 30% 내외의 시청률을 보였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퇴조라고 할 수 있다.

SBS는 올해 초 코미디와 버라이어티 쇼를 결합한 퓨전 코미디를 선보이겠다며 '웃는 밤 좋은 밤'을 방영했다. 그러나 인기 개그맨 캐스팅에 실패한 데다 시청률이란 암초에 걸려 방송 4회만에 좌초됐다.

MBC 이응주 PD는 "사람들에게 왜 코미디를 보지 않느냐고 물으면 '억지로 웃음을 짜내는 코미디보다 더 재미있는 오락 프로그램들이 많아서'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며 "엄밀한 의미에서의 TV 코미디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 내몰리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코미디, 이끌 사람이 없다

그동안 방송 코미디는 걸출한 몇몇 PD들의 노력에 의해 상당 부분 발전해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엔 젊은 코미디 PD들이 잘 배출되고 있지 않다. 일주일 내내 아이디어에 쫓겨야 하고, 시청률 압박도 심한 코미디 프로를 기피하는 풍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개그맨 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상당수 개그맨들이 인기를 얻으면 본업인 코미디 무대를 지키기보다 MC,라디오 DJ 등으로 전향하기 일쑤다.

코미디 PD들은 기로에 선 코미디를 살리기 위해서는 방송사측의 의지가 가장 우선돼야 한다고 말한다. 시청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KBS가 '개그 콘서트'라는 작품을 만들었듯이 실험적이고 신선한 포맷을 계속 시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MBC 장태연 제작 2국장은 "코미디는 한 시대를 풍미해온 장르이고, 늘 사회적 유행을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며 "시청률이란 하나의 잣대보다는 방송사측이 코미디에 애정을 갖고 더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상복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