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일방주의로 멀어진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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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국 옥스퍼드 인근의 유서깊은 디츨리 파크에서 해마다 열리는 디츨리 회의는 미국과 영국이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해왔다. 몇년 전부터 참석 범위가 전세계로 확대돼 과거의 적국(敵國)까지 참여하게 됐지만 토론의 초점은 늘 '국제사회의 협력방안'이다. 그런데 지난주 열린 올해 회의에선 평소와 전혀 다른 풍경이 연출됐다.'9·11 테러의 장기적 영향'이란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면서 미국과 다른 나라 참가자들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미국의 어느 동맹국도 대테러전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전쟁을 어떻게 치러 나갈지, 또 대테러전에 부수적으로 동반될 여러 위험한 상황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지를 동맹국들에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대테러전을 '악과의 싸움'이라고 말한 것은 특히 유럽인들을 불안하게 한다. 악과의 싸움은 무제한적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싸움에서 손을 털고 나올 '출구전략'이 없는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한 유럽인은 "적의 개념을 악에서 정치·군사적 색채를 띤 테러리즘으로 좁힌다 해도 대테러전은 여전히 승패를 가를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테러리즘이라는 게 워낙 뿌리가 깊고 다양해 근절할 수는 없고, 단지 관리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게 유럽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많은 미국인들은 유럽이 테러리즘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관련 저술가인 월터 러셀 메드는 "미국인들은 유럽의 정치적 판단을 믿지 않게 됐다"고 말한다. 유화정책은 유럽국가엔 '제2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어서 '설득하지 못할 독재자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디츨리 회의에서 미국인들은 "대테러전의 다음 목표는 이라크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후세인을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랍국들엔 테러를 지원해 봐야 득될 게 없다는 깨달음을 주고, 팔레스타인측에는 자살폭탄 공격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넣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또 이라크에 친미정부가 들어서면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미국과의 협력에서 얻는 여러 이점들이 자연스레 선전됨으로써 다른 아랍국가들에도 민주주의·시장경제·친미정권이 자리잡게 돼 테러리즘의 원인인 불공평·분노 등이 사라진다는 논리다.

이런 생각을 '환상'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지만 다분히 희망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이런 논리는 백악관과 펜타곤 매파들의 강경한 입장을 뒷받침해 줄 뿐이다. 이번 회의에서 이라크 공격에 반대한 이들은 미국인들로부터 두 차례나 "동맹국은 필요없다"는 면박을 당해야 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이라크 공격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나토는 반쪽짜리 기구로 전락하고 말 거라는 암시와도 같다. 회의에선 미국과 유럽만 충돌한 게 아니다. 캐나다의 한 인사는 "미국이 국제사회로부터 이라크를 공격해도 좋다는 위임을 받은 것은 아니며 이를 강행하면 동맹관계가 깨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매파에 이런 경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미국과 냉전시대의 동맹국들이 더 이상 국제문제에 대해 공통된 시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의견 불일치는 나토가 탄생한 이래 동맹국 사이에 출현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갈등은 나토의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다. 더 우려할 일은 이 분열로 동맹국들의 관계가 대립하는 관계로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리=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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