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골 내주고 두 골 넣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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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 4분, 직접 프리킥으로 2-1 역전골을 성공시킨 박주영(가운데)을 염기훈 기성용 이영표 등이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다. 박주영은 세계 첫 월드컵 골을 기록했고, 결국 이 골이 16강행을 결정짓는 골이 됐다. [더반=뉴시스]

동점골은 기성용의 프리킥에 이은 이정수의 오른발 슛, 역전골은 박주영의 직접 프리킥. 두 골 모두 세트피스에 의한 그림같은 골이었다.

전반 38분 이정수의 동점골은 그리스전 첫 골과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페널티박스 왼쪽에서 기성용의 프리킥을 ‘골 넣는 수비수’ 이정수가 오른발로 차넣었다. 후반 4분, 역시 페널티박스 왼쪽에서 얻은 프리킥을 박주영이 오른발 슛으로 나이지리아 골망을 흔들었다. 아르헨티나전 자책골의 악몽을 떨치는 동시에 한국의 16강행을 결정짓는 통쾌한 골이었다. 

◆고비 많았던 첫 원정 16강=16강으로 가는 길은 예상했던 일이지만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고 고비를 넘어야만 했다. 남아공 입성 직전 오스트리아 전지훈련에서는 이동국이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잇따라 고배를 마시는 비운을 겪어서다. 이번에도 허벅지 부상 때문에 23명 최종 엔트리에 뽑힐 때까지 가슴을 졸여야 했다. 허 감독은 슈팅력이 뛰어난 이동국이 나이지리아와 경기에서 쓸모가 있다고 판단해 이동국을 발탁했다.

이동국 대신 이근호가 낙마한 건 팬들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이근호는 허정무 팀의 ‘개국 공신’과도 같은 선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원정경기에서 넣은 선제골은 한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사실상 확정 짓는 쐐기 골이었다. 허 감독이 얼마나 냉정하게 23명을 선발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근호를 발탁하지 못한 건 허 감독이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차두리 로봇설’은 월드컵이 열리기 전부터 화제가 되더니 그리스와 첫 경기를 2-0으로 승리하고 난 뒤에는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지난달 24일 일본과 평가전에서 일본 선수 2~3명이 차두리와 몸싸움 끝에 나뒹굴어 ‘차미네이터’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것이 월드컵을 거치며 업그레이드됐다. ‘차범근 SBS 해설위원이 차두리만 나오면 입을 닫는 건 무선 조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관심이 역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전에서 1-4로 패한 뒤 차두리를 기용하지 않은 것을 두고 축구팬들이 거세게 반발하며 허정무 감독을 비난했다. 허 감독이 오범석을 보호하기 위해 “차두리는 그리스전에 문제가 있었고, 오범석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 것이 ‘인맥 때문에 오범석을 기용했다’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전에서 수비 위주의 플레이를 펼친 것을 두고 유령 히딩크 감독이 나타나 “한국은 축구가 아닌 야구를 했다”고 힐난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이 시기 대표팀의 분위기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때 논란의 중심에 섰던 차두리는 “비난하는 것은 좋지만 대회가 끝난 후 해달라. 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한마음으로 힘을 실어 달라”고 간곡히 호소하며 허 감독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당초 ‘유쾌한 도전’을 슬로건으로 월드컵 무대에 나섰던 허정무 감독의 표정도 비장해졌다. 허 감독은 나이지리아전을 앞두고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심정으로 나이지리아전에 나서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솥을 깨고, 배를 침몰시킨 후 나이지리아전에 나서겠다는 결사 항전의 각오였다. 허 감독 발언으로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았던 ‘파부침주’라는 고사성어가 축구 팬들에게 널리 퍼지기도 했다.

더반=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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