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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화 더딘 존엄사 … 희망자는 점점 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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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해 12월 말 서울아산병원에 박모(75·여)씨가 실려 왔다. 피부에 세균이 감염된 뒤 상태가 나빠져 이송된 것이다. 치료를 했지만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18일 만에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인공호흡기를 달았으나 이것으로도 체내 산소량이 모자라 특수산소공급장치(체외막산소화장치)를 달았다. 피를 밖으로 빼 산소를 넣은 뒤 체내로 집어넣는 장치다. 박씨는 이런 식으로 열흘가량을 버텼지만 폐·심장·콩팥 등 여러 장기가 손상되는 복합장기부전에 빠졌다. 가족들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산소공급장치를 떼 달라고 요구했다.

박씨 가족들은 연명치료 중지요청서를 작성했다. 신청 사유 다섯 가지를 모두 점검했다. ▶회복 가능성이 없고 ▶고통이 조절되지 않으며 ▶현재 상태 유지가 무의미하고 ▶삶의 질이 좋지 않으며 ▶진료비가 부담된다는 것이다. 병원 측은 윤리위원회를 열어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고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했다. 얼마 안 지나 박씨는 숨졌다. 박씨의 연명치료 중단의 근거는 아산병원의 자체 지침이다. 이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연명치료 중단 대상이 된 세브란스병원 김모 할머니 사건 이후 만든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지난해 6월 23일 세브란스병원이 김 할머니의 호흡기를 제거한 지 1년이 지났다. 그 이후 연명치료 중단, 즉 존엄사가 의료 현장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난해 7~12월 서울대병원에서 인공호흡·심폐소생술 등의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사전의료 지시서를 본인이나 가족이 쓴 뒤 숨진 말기 환자는 40명이다. 이들 중 10명은 환자 본인이, 나머지는 가족들이 지시서를 썼다. 이 병원 허대석(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종전에 비해 환자 본인이 직접 작성한 경우가 25%가량 늘었다”며 “질병 상태와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문제점을 환자에게 정확하게 알려주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 산소호흡기 제거 후 의료계가 만든 존엄사 지침을 활용하는 병원들이 늘었다. 대한의학회·의사협회·병원협회가 지난해 10월 연명치료 중단지침을 만들자 서울아산병원과 삼성서울병원 등 일부 병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아산병원에서는 이 지침에 따라 4명의 환자가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했다. 삼성은 1~2명이 그랬다.

김 할머니가 입원했던 세브란스병원은 매우 신중해졌다. 병원 윤리위원회 승인을 받고 연명치료를 중단한 환자는 없다. 다만 두 명이 윤리위 신청 직후 숨졌다. 세브란스병원 관계자는 “의사들이 움츠린 탓인지 끝까지 진료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존엄사 법제화 작업은 더딘 편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2월 종교인·의료계·변호사 등이 참여하는 사회적 협의체를 만들어 연명치료 중단 기준을 논의하고 있지만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했다.

신성식 선임기자,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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