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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문화' 속에 또다른 미래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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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겨 울은 귀로 듣고 봄은 눈으로 본다. 겨우네 방안에서 문풍지 소리만 듣다가 창을 열고 나서면 일제히 들판은 초록색으로 변하고 검은 나뭇가지에는 현란한 꽃들이 핀다. 그것을 더욱 아름답게 시각화하는 것이 나물 캐는 여인네들의 모습이다. 가까운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한국 특유의 그 정경을 생각해보면 '봄'이라는 말이 과연 '보다'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유난히 나물을 좋아하는 것이 이 민족의 기층문화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전자 사전으로 나물 자가 들어 있는 한국말을 검색해보면 '가는 갈퀴나물'에서 '흰 바디나물'에 이르기까지 무려 2백50가지나 된다. 프랑스인이나 중국인이 "책상만 빼고 네 다리 달린 것은 모두 다 요리 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고 있지만 아마도 한국인은 "참기름만 주면 모든 풀을 나물로 무쳐 먹을 수 있다"고 자랑할지 모른다.

"그 것은 자랑이 아니다. 초근목피로 연명해온 가난의 상징이다"라고 화낼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임금님도 나물을 들고, 입춘이 되면 신하들에게 오훈채를 내렸던 옛 풍습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원래 오훈채란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에서 자극성이 강하다 하여 기피해 왔던 부추와 무릇 같은 나물들이다. 그런데도 색동옷처럼 우주를 상징하는 다섯 가지 오방색을 갖춘 오훈채를 먹지 않으면 봄맞이를 못하는 것으로 알았다. 색깔과 모양과 그리고 맛이 제각기 다른 나물들을 무치면 그것들은 서로 어울려 조화와 화합의 오묘한 맛을 낸다. 나물이 들어가지 않으면 비빔밥이 되지 않는 원리를 생각해보면 오훈채가 아니라도 나물 문화가 어떤 사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나물을 먹는다는 것은 한국인의 생활철학과 그 우주를 먹는다는 것이다.

제상에 오르는 삼색나물을 봐도 알 수 있다. 뿌리나물인 도라지의 흰색은 조상을 상징하고 줄기나물인 고사리는 검은 색으로 부모님을 뜻한다. 그리고 미나리 같은 잎나물은 푸른색으로 '나'를 가리킨다. 나물의 부위와 색깔을 과거·현재·미래의 조(祖)-부(父)-손(孫) 3대를 나타내는 문화적 코드로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나물을 문화 텍스트로 보면 나물바구니에 들어 있는 것은 빈곤의 눈물이 아니라 노래와 어깨춤의 풍요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나물을 캐고 무치고 먹는 그 행위는 자연과 어울리고 우주의 생명력과 교감하는 생활 의식(儀式)의 하나다. 그리고 단군신화의 쑥과 마늘은 한국 나물문화의 원형이 된다. 쑥은 물론이고 그 마늘 역시 오늘날 봄나물에서 빼 낼 수 없는 달래마늘로 보일 것이다.

나물 캐는 풍경은 이미 유행가나 민속무대에서도 사라졌는데 한국인의 밥상 위에서는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끈질긴 나물문화에서 한국인의 문화유전자에 깊이 각인된 만년 전 채집문화와 상면하게 된다. 동과 서를 가리지 않고 인류는 수렵채집문화에서 출발해 우리처럼 모두 나물을 캐먹고 살았다. 그러나 농경문화와 산업시대를 지나면서 서구사람들은 채집문화를 깨끗이 버리거나 망각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인만은 그런 문명의 변화 속에서도 채집 세대의 흔적인 나물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인들도 그들이 독초라고 두려워하는 고사리를 뜯어다 먹고, 카본 페이퍼 같은 김을 먹어 그들을 놀라게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한국 문화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그 채집문화가 이제는 서양에서도 21세기 미래 문화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가면 채집형 나물문화야말로 현대문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라고 주장하는 문명론자들과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한때 화제를 몰고온 마셜 샐린즈의 명저 『석기시대의 경제학』이다.

자 연생태계의 한 일원으로 살아왔던 석기시대의 생활양식과 그 경제모델을 연구한 샐린즈의 말은 우리가 잊었던 한국의 나물문화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왜 조선조의 선비들이 '청빈(淸貧)'을 예찬하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를 베고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했는지를 경제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샐린즈는 인간이 풍요에 이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증대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생산성을 계속 향상시켜 가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욕구 자체를 최소화해 적은 물질을 가지고도 만족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수렵=채집시대의 나물문화는 윤택한 삶과 번영을 객관적인 물질의 풍요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무욕무결(無慾無缺·want not,lack not)에서 풍요를 찾는 후자에 속한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오히려 근면과 생산성은 제한된 숲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나쁜 행위로 보여진다.

그래서 채집시대의 경제모델은 현대인처럼 대량생산 과잉저장과는 반대로 저생산(低生産)구조와 반저장(反貯藏)체계의 문화양식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저생산·반저장을 특징으로 하는 나물문화는 고도 경제성장의 극한과 그 강박관념의 신경증을 앓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충격요법이 되는 것이다.

또한 채집시대의 나물문화는 걷는 문화라는 데 또 하나의 특성을 지닌다. 고릴라는 하루에 2㎞밖에 걷지 못하고 인간에 가장 가깝다는 침팬지도 5~6㎞밖에는 걷지 못한다. 그러나 자원을 찾아 수시로 이동해야 하는 수렵채집민들은 하루에 30㎞ 이상 걸어다닌다. 그러기 때문에 채집문화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작은 재물일수록 큰 물건보다 값어치가 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운반하기 쉬운, 가반성(可搬性)이 그 희소성이나 노동 코스트보다 우선하는 경제를 만들어 낸다.

그뿐만 아니라 농경과 산업 문명이 한곳에 집중 정주하는 '패러노이어'형 문화라고 한다면 수렵채집민의 문화는 이동 분산형인 '스퀴저프레니어'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휴대폰·모바일 컴퓨터, 그리고 개인휴대단말기(PDA)를 들고 돌아다니는 오늘의 젊은이들이야말로 21세기의 새로운 채집민들의 예고편인 것이다.

20 세기를 '잠을 도둑맞은 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혹은 '24시간 사회'라고 명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샐린즈의 분석으로 보면 채집민들은 어떤 문명시대보다도 1인당 수면량이 가장 길어 거의 12시간을 잤다.

노동시간은 4,5 시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러고서도 남자 한명이 4~5명을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구의 5분의1 이상이 나머지 사람들의 식량을 대기 위해 농업에 종사해야만 했던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프랑스인들보다도 훨씬 효율적이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통계를 보면 호주의 원주민들은 미국이 한사람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75분의1에서 1백분의1로 인간을 부양한다. 고정 생산량의 단위당 에너지 비율로 보면 수렵채집민은 우리보다 1백배나 그 효율이 높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농업경제학자 보스라프의 연구를 보면 지난 세기의 90년 동안 노동자 1인당 생산량은 8.4배가 늘었고 1㏊당 생산성은 3.5배나 증대되었다고 한다. 노동생산성과 토지생산성의 증가율은 7백40%와 2백50%에 달한다.

그러나 이런 눈부신 생산성 뒤에는 대량의 화학비료와 농약, 트랙터와 같은 농기계의 도입 그리고 그것들을 움직이는 화석연료들이 있다. 그런 것들에 든 자금과 노동력을 생각하면 농업생산의 진보는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 기능은 발전하고 효율은 후퇴한 것이 20세기 산업의 아이러니다. 그러니 21세기의 목표는 자연히 기능보다 효율을 높이는 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구석기시대의 그 특유한 생활리듬을 꿈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주(週)5일제를 도입하기 위해 턱걸이를 하고 있는 우리들의 대선배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인류가 시간에 쫓기고 중노동을 해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농업혁명을 이룬 신석기시대 이후의 일이다. 무기 중노동의 형을 복역하고 있는 것은 야만스러운 구석기시대의 채집민들이 아니라 바로 생산과 소비의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지금 인류의 3분의1 또는 거의 태반이 매일 밤 굶주린 배를 틀어쥐고 잠자리에 든다. 샐린즈는 전대미문의 '굶주림의 세기(世紀)', 그것이 바로 현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첨단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 시대에 기아가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고 개탄한다.

그러니까 이 문명은 나그네가 한발 앞으로 다가서면 목적지는 두발 뒤로 물러서는 옛 신화의 그 이상한 땅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화여서는 안된다.'빈 바구니만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나물 캐는 아가씨는 어디로 갔는가.' 이런 시구처럼 한국의 나물문화는 지금 빈 바구니만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깊이 각인된 석기시대의 흔적, 나물문화를 다시 생각해보면 그 빈 바구니를 가득 채울 행복의 패러다임을 그려낼 수가 있을 것이다.

<일곱마당>

나물을 먹는다는 것은 한국인의 생활철학과 그 우주를 먹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끈질긴 나물문화에서 한국인의 문화유전자에 깊이 각인된 만년 전 채집 문화와 상면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한국문화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그 채집문화가 이제는 서양에서도 21세기 미래 문화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한때 화제를 몰고 온 마셜 샐린즈의 명저 『석기시대의 경제학』이다.

샐린즈는 인간이 풍요에 이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증대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생산성을 계속 향상시켜 가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욕구 자체를 최소화해 적은 물질을 가지고도 만족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수렵=채집시대의 나물문화는 윤택한 삶과 번영을 객관적인 물질의 풍요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無慾無缺(want not, lack not)에서 풍요를 찾는 후자에 속한다.

한국의 나물문화는 지금 빈 바구니만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깊이 각인된 석기시대의 흔적, 나물문화를 다시 생각해보면 그 빈 바구니를 가득 채울 행복의 패러다임을 그려 낼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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