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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영화감독 빌리 와일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뜨거운 것이 좋아''7년만의 외출''선셋 대로'등의 히트작으로 할리우드는 물론 한국의 '할리우드 키드'마저 사로잡았던 빌리 와일더 감독. 그가 지난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 힐스의 자택에서 폐렴으로 타계했다. 96세.

조감독 시절 그의 영화를 즐겨 봤다는 임권택(權澤·66)감독은 "어느 한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필름 누아르·로맨틱 코미디·서스펜스 등을 종횡무진 누볐던 고인은 재치있는 풍자가 일품인 명감독"이라며 애도했다.

와일더는 감독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작품성과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성취한 보기 드문 할리우드 감독 중 한명으로 꼽힌다. 또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열두 차례나 오를 정도로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였다. 가볍게 비꼬는 듯하면서 적확한 단어를 골라 그 묘미를 살리는 대사가 그의 장기였다.

탄탄한 이야기 축조술도 영화 학도들의 찬사를 자아냈다. 언어의 연금술에 능란했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투투 대주교의 억양을 섞었다"고 평한 독일식 액센트를 평생 버리지 못했다.

1906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베를린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 나치의 핍박을 피해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본명은 사무엘 와일더. 그의 어머니는 버펄로 빌에서 따와 아들의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독일어밖에 모르던 그는 시나리오를 할리우드에 팔기 위해 영어를 배웠다. 37년 패러마운트사에 각본을 팔기에 이르고, 당대의 코미디 감독으로 칭송받던 에른스트 루비치의 '푸른 수염의 여덟번째 아내'등의 각본을 쓰게 된다.

40년대 중반부터 '잃어버린 주말''하오의 연정''사브리나''제17 포로수용소' 등을 잇따라 발표하며 와일더의 전성기는 시작된다.

그의 곁에는 항상 스타들이 있었다. 흰 드레스 차림에 매끈한 다리로 섹시함을 마음껏 과시했던 마릴린 먼로를 비롯해 오드리 헵번·게리 쿠퍼·윌리엄 홀든·잭 레먼·글로리아 스완슨 등이 그들이다.

잭 레먼과 셜리 매클레인이 출연한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60년)는 그가 후반기에 주력한 강한 풍자의 코미디 영화다. 이 영화로 그는 작품상·감독상·각본상 등 아카데미상의 '트로이카'를 휩쓰는 진기록을 세웠다. 아쉽게도 70년대 이후 그는 과거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했다.

와일더가 사망한 뒤 할리우드 명사들의 조사(弔辭)가 앞을 다퉜지만 노배우 셜리 매클레인의 발언을 따를 만한 것은 없는 듯 싶다. "나는 그 어떤 사람보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천국에서도 또 다른 걸작을 쓰고 감독할 것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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