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제2부 薔薇戰爭 제2장 揚州夢記 : 부릅뜬 눈, 소리치는 정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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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정년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또한 형님이 아시다시피 대총관 나으리께오서 곧 절도사가 될 것이 아니겠나이까. 하오면 설마 왕장군께오서 형님과 이 아우를 모른 체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정년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무렵 왕지흥은 무령군 부절도사에서 꿈에 그리던 절도사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장경(長慶)2년(822)가을이었다. 실제로 왕지흥은 생명의 은인인 장보고와 정년을 친아들 이상으로 총애하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두 사람을 총관으로 승진시켜줄 것을 약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정년의 말대로 두 사람이 총관이 될 수 있다면 이는 5천명 이상의 대부대를 이끄는 대장으로, 상현(上縣)의 수령과 맞먹는 고위관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년의 말을 듣고 난 장보고가 빙그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론 너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다. 대총관나으리께오서 절도사가 되시면 우리를 모른 체 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총관께오서 절도사가 되기까지는 너와 나의 무공이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절도사가 되시면 이미 너와 나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옛말에도 있지 않느냐. '교활한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게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대총관께오서는 절도사가 되심으로써 사냥을 끝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냥개인 너와 내가 또다시 필요해질 것이냐."

'교활한 토끼가 잡히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진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성어에서 나온 말로 이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한신(韓信)을 창업 공신으로 높이 대우하고 초왕으로 봉했던 이후 비롯된 것이다.

당시 한신에게는 항우의 밑에서 용맹을 떨쳤던 종리매(鐘籬昧)가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오랜 친구이기도 하였다. 종리매가 한신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유방은 불같이 화를 내며 종리매를 당장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신은 오히려 명을 어기고 그를 숨겼다. 그러나 한신이 반역을 꿈꾸고 있다는 상소가 유방에게 올라오자 유방은 이 기회에 한신을 주살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한신이 생각 끝에 유방을 배알하기로 결심하자 그의 심중을 파악한 가신이 한신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종리매의 목을 쳐서 가져가신다면 폐하께서는 의심을 풀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어찌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친구를 배신한단 말인가. 한신이 고민 끝에 종리매에게 사정을 털어놓자 종리매가 분노하여 말하였다.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유방이 초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자네 곁에 내가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도 자네가 내 목을 가져가겠다면 지금 당장 죽어주지. 하지만 내가 죽으면 그땐 자네 역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게."

분개한 종리매는 곧 자결하고 말았다. 한신은 친구의 목을 가지고 유방을 배알하였으나 예상과는 달리 역적으로 포박 당하고 마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한신은 분개하여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狡兎死良狗烹),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 속에 처박히며(高鳥盡良弓藏),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고 마는구나(敵國破謀臣亡)."

장보고의 말은 바로 한신이 탄식했던 그 말을 빌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장보고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대와 나는 사냥개이며, 좋은 활에 불과하다. 더 이상 사냥할 토끼가 없고, 더 이상 잡을 만한 새가 없는데, 어찌 요긴하게 쓰임새가 있을 것이냐. 마땅히 전쟁이 없을 때에는 창과 칼을 녹여서 보습을 만들어 땅을 갈아 씨를 뿌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 땅이 어디나이까. 창과 칼을 녹여서 보습을 만들어 씨를 뿌릴 땅이 도대체 어디에 있나이까."

눈을 부릅뜨고 정년이 소리쳐 말하였다. 그의 두 눈에서 불이 뿜는 것 같았다. 그러자 장보고가 가만히 손을 들어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바로 이곳이다. 바로 그대와 내가 선 이 자리가 창과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어 흙을 갈아 씨를 뿌릴 바로 그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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