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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식 학습지 시장 봄바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7면

경기도 안양시 인덕원 대우아파트 백신희(7)네 집. 지난 19일오후3시쯤. 신희가 동현·지선군 등 또래 어린이 3명과 함께 둘러앉아 한 학습지 교사의 지도 아래 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공부하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흔히 볼 수 있는 시험지형 학습지는 없다. 대신 '새와 쥐와 소시지'라는 동화책이 어린이들 앞에 놓여 있다. 시험 문제를 푸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각자 동화책의 등장인물이 됐다. 먼저 각자의 역할에 따라 돌아가며 동화책을 읽었다. 그 후 교사는 "궁금한 게 뭐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묵묵부답. 할 수 없이 교사가 궁금한 점을 애들에게 물었다. 신희가 대답했다. 교사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었고 신희의 대답은 이어졌다. 교사는 이를 받아 동현이에게 "신희 생각과 같은지, 아닌지" 물었다. 동현은 "다르다"고 했고 "뭐가 다르냐"며 교사는 동현의 의견을 다시 물었다.

이날 수업은 이와 같은 식으로 1시간10분간 진행됐다. 수업이라지만 교사의 말보다는 아이들의 말이 더 많았다. 학습은 아이들의 토론장이었고 교사는 가만히 진행만 하며 대화의 물꼬를 터 줬다.

이른바 토론식 국어학습이 유·초등 학습지 시장에서 확산되고 있다.

기존에는 국어학습지 하면 주어진 문장을 읽고 사지선다형 문제풀이를 통해 문장 내용을 이해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수준이 대세였다. 읽기와 쓰기 위주였다. 무조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 뜻이 통하고 이를 이해하면 된다는 교육방식이었다. 교사는 명령하듯 직선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가르쳤다.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려줬다. 학생들은 교사의 가르침을 암송하고 그대로 수용해 이해하면 됐다. 학생들은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이었다. 선생은 가르치고 학생은 외우고 적는 것이 수업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위 아리스토텔레스식의 교육방식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학생들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끼리 대화를 통해 뭔가 발견하게 하는 토론식 독서법이 어린이 국어 학습지 시장에 도입되고 있다. 질문과 답변, 또 거기서 파생되는 질문과 아이들끼리의 의사 교환이 이어진다. 교사는 아이들의 말에서 단지 파생되는 질문을 통해 그들이 토론과정에 스스로 터득토록 분위기만 이끌어간다. 플라톤의 대화법을 인용한 학습방법이다. 학생들은 3~4명 또는 4~5명씩 '모듬'을 이뤄 공부한다.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말하고 듣고 생각하면서 즉, 사회적 행위를 하면서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학습법이다. 고기를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미국에서 새로 도입되고 있는 학습법이다. 공교육에서 우선돼야 할 학습법이 사교육 시장에서 앞서 꽃 피우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토론식 독서와 학습법이 사교육 시장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 학습법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교사·학부모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반복해서 많이 읽으면 뜻이 통한다는 식의 독서교육법은 경전 중심의 중세기에는 맞았다. 그러나 많은 양의 정보·지식이 폭주하고 지식의 유통 기간이 짧은 현대 사회에는 알맞지 않다. 이에 걸맞는 독서법이 개발돼야 한다." 서울교대 황정현 교수의 말이다.

대학 입시, 회사 입사 시험에서 논술·면접·의사 표현·토론의 중요성이 갈수록 부각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학부모들 사이에 어려서부터 이런 능력을 길러줘야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전학년으로 확산된 초등학교 7차 교육과정이 이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학습지 시장을 먼저 움직이고 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미국의 독서교육연구소 GBF의 피터 팀즈 총재는 최근 한국에서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화를 통한 토론식 학습은 교사가 학생의 질문에 답하고 함께 생각하고 의견을 제안해주는 효과적인 학습 과정이라는 인식이 미국에는 널리 퍼지고 있다. 틀에 짜여진 교과 과정이 중시되기 보다는 학생들 각자의 합리적 지성이 학습 과정에 살아 움직이게 된다."

J섹션 조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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