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돈되는 영화'만 만든다 : 충무로 블록버스터 스타·자금·인력 싹쓸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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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소위 주연급이라는 30대 남자 배우 모두에게 시나리오를 보내봤어요. 그런데 다들 거절하더군요.'시나리오는 맘에 드는데 제작사 규모가 너무 작다'는 이유였지요. 한 마디로 돈 안될 것 같은 영화라는 거죠."

최근 30대 관객을 겨냥한 멜로 영화를 기획하다 도무지 캐스팅이 안돼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마술피리 오기민 프로듀서의 한탄이다. 지난해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로 고배를 마셨던 그는 "대규모 예산에 액션이 가미된, 이른바 '대박'이 예상되는 영화 아니면 스타들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메이저 제작·배급사들의 등장으로 한국 영화 시장이 지난해와 같은 도약을 할 수 있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탄탄한 기획력과 안정된 배급망·스타 시스템의 구축 등 '기초 공사'를 통해 상업 영화 시장의 토대를 다지는 데는 아직도 이러한 '주전 선수'들의 실력 발휘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 영화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그러나 지난해의 화려한 상업적 성공 뒤에는 한국 영화의 앞날을 낙관하기만은 힘든 그늘이 있다. 자본·인력이 '돈 되는 영화'로만 몰리는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이로 인한 작품의 획일화에 대해 영화인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지난해 히트한 영화들을 보면 시네마서비스·CJ엔터테인먼트·명필름·싸이더스 등 몇 안되는 회사들이 몇 안되는 스타들을 나눠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독과점의 가장 큰 원인은 상업성을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서는 안전한 '라인(線)'을 타야 한다는 인식이 매니저와 배우들 사이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제작사들도 스타 없이는 섣불리 일을 벌이지 않는다. 이는 충무로에 미래에셋(코리아픽처스)·국민기술금융(KM컬처)등을 위시한 금융 자본이 대거 들어오면서부터 제작사들이 이들의 투자를 받기 위해 스타 캐스팅을 일종의 '담보'로 활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성 있는 장르 영화를 개발하기보다 유명 배우를 내걸고 투자를 받아내다 보니 신인을 발굴할 틈이 거의 없다.

'크게 벌어 크게 나누자'는 양쪽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지점에 있는 것이 바로 제작비가 높게 책정된 블록버스터(대작)영화다. 올해 개봉했거나 개봉할 영화들은 최소한 제작비가 60억원을 웃돈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80억원을 훌쩍 넘었다. 유오성을 기용한 '챔피언'도 애초 목표했던 60억원을 초과할 전망이다. 이 돈을 회수하려면 최소한 전국 관객 2백만명은 넘어야 하니 마케팅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평균 30%에서 심하게는 제작비의 절반 가까운 액수를 마케팅에 쏟아붓는 기형적인 현상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장르 역시 흥행에 대한 부담이 작은 액션·코미디가 주조를 이룬다. 결국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금융 자본이 뒷돈을 대는 현실에서 기획자의 균형 감각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상명대 조희문(영화학과)교수는 "평균 관객 1백만명을 동원하는 작품이 연간 대여섯편 가량 나오는 안정된 시스템이 갖춰지려면 지금과 같은 메이저 제작·배급사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소재가 편중되고 배우층을 다양하게 갖추지 못한 지금의 상황은 분명히 가까운 미래에 한국 영화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선민·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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