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는 동물 교통사고 '王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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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광활한 평원이든 울창한 삼림 속이든 널찍하게 일직선으로 뚫린 미국의 고속도로는 우리에게 분명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미국의 도로에는 특유의 끔찍함도 있다. 차에 치여 죽은 다람쥐·오소리·토끼·너구리·뱀·개구리 등 온갖 야생동물의 잔해들이 그것이다. 털가죽만 남은 짐승의 잔해를 깔고 지나가는 정도는 그래도 괜찮다. 미처 발견하지 못해 도로 위의 동물을 그냥 치고 달려갈 수밖에 없는 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미 연방 어류·야생동물보호국의 추정에 따르면 미국에서 차에 치여 죽는 동물(Road-kills)은 연평균 4억마리 남짓이다. 하루 평균 1백만마리가 넘는다. 물론 곤충들은 빠진 수치다.

이 중에는 부딪히면 그 충격으로 대형 교통사고까지 유발하는 사슴도 35만마리가 포함돼 있다. 사슴이 특히 많은 미시간주에서는 지난해 약 1백20여명의 운전자가 사슴과의 충돌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몇몇 주들은 동물의 이동이 늘어나는 봄철에 대비하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주말 운전자를 상대로 안전운전 홍보를 하는 주도 있고, 도로 밑에 동물 이동통로를 설치하는 주도 있다. 아직도 표범이나 검은곰 같은 희귀동물이 서식하는 플로리다주는 75번 고속도로 일부 구간에서 철책 보수작업을 벌였다.

버지니아주는 25년 전 64번 고속도로 가운데 심었던 수천그루의 올리브 나무를 지난달부터 뽑아내고 있다. 열매가 개똥지빠귀·홍관조 등 주요 철새들의 먹이가 됨으로써 새들이 차에 부딪히는 사고가 늘어난다는 이유에서다. 일부 지방언론은 '이 나무들이 마주오는 차량의 불빛을 막아줘 야간운전에 도움이 됐는데 정부가 세금으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불평했지만 주정부 환경위원회는 '새들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충격은 야구에서 강속구가 배트에 맞는 충격과 같다'고 맞섰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동물 교통사고 세계 1위'라는 사실을 의식조차 못한다. 노상 동물보호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의 자동차 문화에서 볼 때 불가피한 측면도 있고,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외국의 음식문화까지 간섭할 정도로 극성스런 동물사랑을 보여온 미국인에게 이런 무관심은 왠지 의아스럽다. 길들여진 동물에 국한된 동물사랑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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