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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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선영(1964~ ) '눈' 전문

눈이여, 너는

땅에 닿지 말아라

너는 하늘에서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유리창, 공기의 하얗게 벌어지는 열매여서

땅에 내린 너는 깨어진 조각이고 으깨어진 열매이다

눈송이여, 잠깐만 나를 가두어다오

땅 위에서 나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눈이여, 너는

땅에 살지 말아라

공중으로 잠깐씩 들어 올려지고 싶은 육체들을 거두어들이는

날아다니는 밀실이 되어라


세상 온갖 굴곡을 단색으로 단순하게 덮는 눈. 가슴을 깨끗하게 헹궈주는 눈. 비처럼 직선으로 우직하게 떨어지지 않고 발레하듯 가벼운 동작으로 내리는 눈. 그러나 땅에 떨어지면 곧 녹거나 으깨어져 진흙탕이 된다. 그래서 시인은 눈에게 땅에 닿지 말라고 말한다. 또한 땅에 있으면서 훼손되거나 더러운 것들에 휩쓸려가는, 그래서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고 싶은' 시인 자신도 눈송이 안에 가둬 달라고 부탁한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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