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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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피나는 노력 끝에 기막힌 제품을 개발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얻지 못하고 남들만 이익을 보게 만든 '봉(鳳)'은 각 분야에 많다. 세계 무기개발사에서 대표적인 봉을 꼽자면 아마 미하일 칼라슈니코프일 것이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중 부상한 이 러시아인은 요양 중에도 신무기 설계에 열중하다 소련 당국의 눈에 띄었다. 신무기는 저 유명한 AK-47 자동소총으로, 47년 소련군의 표준소총으로 채택됐다.

전세계적으로 7천만정이나 팔려나갔고 50여개국에서 진품 또는 모조품이 사용되며, 뮌헨 올림픽 유혈테러와 사다트 암살, 제3세계의 숱한 내전에 동원된 이 소총은 그러나 칼라슈니코프의 주머니는 한푼도 채워주지 못했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노인이 된 그를 육군소장으로 진급시켜 연금을 올려준 것이 고작이었다.

같은 러시아인인 미하일 이오시포비치 구레비치도 '봉'대열에서 빠질 수 없다. 미그기의 '미그(MiG)'는 구레비치의 동료 미코얀(아르톰 이바노비치 미코얀)과 구레비치의 이름 머리글자를 합친 것으로, 러시아어로 '순간, 즉시'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프랑스 유학도 한 구레비치는 비행기 제작에 특히 흥미가 많았다. 39년 미코얀과 힘을 합쳐 독자적인 비행기 제작에 착수한 그는 곧 스탈린으로부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소련 정부의 위탁으로 설계·제작한 전투기들이 미그 1·3·9·15·21 등 일련의 미그기 시리즈다. 특히 미그 15는 한국전쟁 때 미군을 경악시킨 최신예 기종으로 유명했다. 당시 미군측은 자기네 F-86 세이버가 더 강하다고 선전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아직도 미그 15 편이다.

그러나 미코얀은 공산당원인 덕택에 정치국 간부로 진출하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순수한 공학도였던 구레비치는 끝까지 입당을 거부하며 연금으로 여생을 보내다 표창장과 훈장 몇개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요즘 무기업계의 봉은 개발·판매자보다 구매자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우리 군의 차세대전투기(FX) 사업을 놓고 말이 많은 것도 이를 우려해서다. 군을 너무 몰아붙이는 듯한 분위기가 걱정이긴 하지만, 더도 덜도 말고 투명하고 공정하게 기종을 선정하라는 재촉으로 여기면 될 것이다. 4조원이 넘는 국민 세금을 쏟아붓는 사업이지 않은가.

노재현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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