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내 생각은…

아버지들에게 기를 불어넣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경시가 갈수록 심해지고, 그 현상이 전 지구적으로 보편화하고 있음을 보여준 특이한 조사가 있다. 영국문화협회가 최근 102개 비영어권 국가의 4만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다. 조사 대상자에게 70개의 단어를 제시하고 친근감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도록 한 것이다.

1위는 'mother', 단연 어머니였다. 어머니! 위당 정인보 선생은 계모 슬하에서 자란 분인데도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그대도 밤이 이슥한 시간 창밖에 다가와 있는 보름달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눈물도 나고…. 그런데 '아버지'는 어디 가셨지?

이 조사는 '열정(passion)' '미소(smile)' '자유(freedom)' '환상적인(fantastic)' '평온(tranquility)' '운명(destiny)', 심지어 '딸꾹질(hiccup)' 등을 서열화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70위 안에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버지! 며칠 전 어느 시골의 한 40대 초반 남자가 제 아버지 무덤 앞에서 극약을 마시고 세상을 등졌다. 사랑하는 처자식들은 뉴질랜드에 가서 '좀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별거가족이었다. 외로움이 사인(死因)이라는 분석이 대세다. 이땅의 수많은 아버지에게 눈앞에 다가온 겨울은 추위가 아니라 무게다. 무거움이다. 위의 아비도 외로움이 아니라 무게가 사인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압사(壓死)라고 해야 옳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키보다 더 높은 등짐을 지고 험산을 오른다. 빈부.학력.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아비의 모습은 시지프스의 슬픈 운명과 별다를 바가 없다.

김정현의 '아버지'라는 소설이 세상을 울린 것은 세상의 모든 아비에게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부채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아비들에게 능력을 초과하는 짐을 지우고 슬프게 굴러갈 것이다. 위의 조사는 아비들의 무거운 걸음걸이와 슬픔과 억울함, 부당함, 때로는 분노가 오늘날 인류 전체의 문제임을 밝힌 간담이 서늘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물론 어머니보다 친근하지 못한 잘못이 아버지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아버지들의 위치가 이렇게 내몰리는 것은 정말로 문제가 있다. 12월,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과 모여앉아 일년을 마무리지을 수많은 송년회의 날이 있다.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보내는 이러한 송년모임의 자리에서조차, 세상의 아버지들이 우리가 친근감을 느끼는 주변 단어들 서열 70위 안에도 못 드는 것처럼, 제 대접도 못 받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번 겨울엔, 세상의 아버지들에게도 기를 불어넣어주는 사회분위기를 한번쯤 느끼게 해보자.

오세훈 코리아 환타지 인터내셔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