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行步 한·일서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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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방한 일정을 보면 한·미관계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부시 대통령의 일정이 딱딱한 공식행사로만 채워져 있다면서 내린 한 외교전문가의 평가다. 사실 부시 대통령의 한·미·일 3국 순방 일정을 들여다보면 이런 분석에 내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첫 방문지인 일본에서 부시 대통령의 공식 일정은 메이지(明治)신궁을 찾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곳에서 부시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와 함께 활쏘기인 '야부사메(流鏑馬)'를 관람했다. 저녁 때엔 딱딱한 공식만찬을 피하고 '노 타이' 차림으로 도쿄(東京) 시내의 선술집에서 격의없는 식사를 하며 '우의'를 다졌다. 다음날엔 참의원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개혁을 지지하는 연설을 한 뒤 일왕(日王)을 예방하는 것으로 방일을 마무리했다. 일본 방문은 '친구' 사이를 강조하면서 미·일 우호관계를 돈독히 했던 일정이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에 이어 방문할 중국에서의 부시 대통령 일정에서는 미래지향적 미·중관계가 읽힌다.

도착일인 21일 장쩌민(江澤民)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고 공식만찬을 한 뒤, 다음날 주룽지(朱鎔基)총리 및 江주석 내외와 잇따라 조찬·오찬을 한다.

특히 이날 江주석의 대를 이을 후진타오(胡錦濤)부주석의 안내로 중국의 미래를 걸머지고 나갈 칭화(淸華)대에서 연설할 예정이다. 부시 대통령이 미·중관계 진전에 어느 정도 무게를 싣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우리의 강력한 요청으로 남북 분단의 상징인 도라산역을 방문한 것과 20일 저녁의 리셉션·만찬이 '친목'을 위한 행사의 전부다. 이에 비해 부시 대통령은 주한미군 부대 두곳을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함으로써 한반도를 '최전선'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와 관련, 한 정부 관계자는 "방한 일정 협의과정에서 미측은 한·미 우호관계를 강조하는 행사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부시 대통령은 20일 공동 기자회견 때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부시 대통령의 발언이 수사(修辭)에 그치지 않기 위해선 한국 정부와 한국민의 생각·처지를 보다 잘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동시에 우리 정부도 남북관계의 단기적 성과에만 매달리지 말고 '테러와의 전쟁' 이후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과 우리의 민족 문제 해결방안을 잘 조율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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