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축'서울發 문제제기 왜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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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이후 세간의 관심이 일제히 '게이트'에서 북·미간 긴장과 대북정책 문제로 옮아간 가운데 중앙일보도 지난 2주간 매일 4~5개 면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4일부터 16일 사이 열흘치 신문에서 이와 관련된 사설과 칼럼만 15편이나 됐다.

국제정치에 대한 전문지식과 경륜을 토대로 쓴 이 글들은 한결같이 국익을 위한 냉정한 현실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그 공통된 요지는 정부의 대미 외교와 햇볕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한·미 공조를 강화할 것을 요구하며 북·미간 대화와 여야 정치인들의 초당적 협력을 주문하는 것이다. 아울러 국내 여론에 대해서는 의견대립과 감정적 대응의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모두 옳은 얘기다.

그러나 이처럼 중대한 사안에 모두가 한 목소리로 현실론만을 말하고 있는 것 또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방향이 다른 관점이나 주장이 전혀 제기되지 않는다면, 7면 끄트머리의 '사외(社外)기고의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라는 설명도 필요 없는 말이 된다. 이를테면 미국의 일방적인 외교행동들에 대한 어떠한 원론적이고 솔직한 문제 제기도 이 글들 중에서는 나온 바 없다. 대신 '북한은 이란·이라크와 다르다'(8일자 9면, 브루킹스연구소 마이클 오핸런 수석연구원의 뉴욕 타임스 기고문)든지, '北, 지난 10년 테러와 관련 없다'(9일자 8면, 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윌리엄 테일러 전 부소장을 인용한 LA 타임스 기사), '미국의 일방주의는 자멸한다'(16일자 7면, 크리스 패튼 유럽연합 집행위원의 파이낸셜 타임스 기고문)는 등의 외신에 나온 기사들이 변죽을 울리듯 인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감정적 대응이나 비현실적 명분론은 피해야겠지만 이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우리가, 미국이 갑자기 내놓은 '한반도 대규모 국지전 가능성'의 이유와 근거를 묻고 그에 대한 우리의 의사와 요구를 분명히 전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외국 언론이 해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야 그들도 우리 신문에서 번역해 인용할 만한 서울발 기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국제사회에 우리의 목소리가 전달될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에 대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데는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채 우리 정부에 대해서만 강도 높은 성토와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은 모순이다. 조금 무지하고 소박하더라도 나는 국제정치에 능통한 전문가들의 의견만이 아니라 인문학자·시인·소설가·종교인이나 과학자 같은 비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 신문에 다른 목소리가 너무 없다.

북·미 관계 기사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업그레이드 코리아'의 의욕적인 기획이 돋보인다. '아이 保育 정부가 나서야'(5,7일자)와 '노인에게 일자리를'(14일자)이라는 두 주제는 이제까지 도외시돼온 여성·아동·노인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점에서 공통되며 서로 맞물려 있다. 한 사람이 노동인력으로 성장할 때까지 드는 시간과 비용에 비해 실제로 경제활동이 가능한 기간이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짧다. 서른이 다 돼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사십대 중반부터는 벌써 퇴직 걱정을 한다. 여성은 그나마 육아와 집안일 때문에 이를 다 채우지도 못한다. 그 나머지 기간의 교육과 생계는 전적으로 본인과 가족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속된 말로 '사람값'이 너무 싸다.

이들 기사는 국가가 이 일에 나서야 하는 이유로 노동 인력의 효율적 활용이라는 경제적 효과를 강조했지만, 이는 또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는 더 근원적인 목표에 닿아 있다. 정부와 국회가 이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노력해줄 것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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