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왜 말이 없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장관이 2일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 "(북한의)핵·생화학 무기는 남한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체제방어 또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협상카드""핵무기가 있다 해도 북한이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 사용하려 하지는 않을 것"등의 발언을 했다.
북한과 미국 간에 험악한 말의 폭격전이 계속되고 세계가 한국 정부의 입장을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丁장관의 발언은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국제사회가 북한의 생화학 무기 및 대량살상무기 보유 사실과 과거의 핵개발 의혹에 대해 우려하고 있고 우리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함은 엄연한 현실이다.
또 그동안 우리 정부의 햇볕정책과 보조를 맞춰 이 문제를 우선순위에서 제쳐두던 미국이 9·11 테러사건 후 이를 다시 우선적 현안으로 들춰낸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때문에 이 문제를 둘러싼 한·미간 정책과 인식의 차이는 최근 들어 고조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한·미 동맹관계에 숱한 긴장과 엇박자를 만들어왔다.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간 교류 협력을 적극 지지해왔다. 하지만 대화와 교류는 냉정한 현실판단과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평화는 환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킬 수 있는 힘과 원칙의 유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북의 대량 살상·생화학 무기가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북정책 책임자가 어떤 정보에 근거해 북의 무기가 단순 협상용임을 판단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개인적 희망사항이라면 너무 무책임한 발언이다.
정부는 북·미간 강성 성명전이 연사흘 계속되는데도 아무런 공식 논평 한마디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민을 향해 대북·대미정책의 기조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방향을 제시해야 할 시점인데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아무런 원칙표명 없이 양쪽 눈치나 살피는 정부의 무원칙한 태도도 답답하지만, 그 총중에 이런 안이한 발언이 주무장관을 통해 나오니 국민은 더욱 헷갈릴 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