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의 '惡의 축'한마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국정연설에서 북한 문제를 강조했다. 북한을 '악의 축'의 일부라고 한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이미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북·미대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강력한 우방인 한국의 대내외 정책을 또다시 훼손했다.
지난해 3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부시의 정상회담은 金대통령과 그의 대북(對北) 화해정책에 재앙이었다. 부시는 대북 화해정책을 경시했다. 이것은 이미 상당한 곤란을 겪고 있던 金대통령의 국내 개혁정책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은 대북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것은 지난해 6월에 마무리됐다. 그 결과 화해정책을 재확인했고, 북한에 대해 전제 조건 없이 언제 어디서든 만나자고 제안했다.
북한에 대해 클린턴 행정부는 우호적인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우려국가'라는 표현을 썼는데 부시 행정부는 '불량국가'라는 표현을 다시 쓰면서 이번에는 '악의 축'이란 표현을 추가했다. 이런 말들은 진지한 협상을 곤란하게 만든다.
부시는 이달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당초엔 그의 방한이 지난해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어긋난 정책협조를 다시 구축할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지금으로선 이번 방한에서 필요한 목적을 달성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외교관계를 수렁으로 몰고 갈 요소들을 갖고 있다.
金대통령은 최근 대북 화해정책을 재확인했다. 그는 헌법에 따라 대선에 출마하지 못한다. 그러나 야당의 대선후보인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도 지난달 23일 워싱턴에서 金대통령과 약간 다르긴 하지만 대북 화해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부시의 한마디는 한국의 여야 모두에 타격을 줬다. 이번 일은 한반도 정책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金대통령의 임기말 국내 정책 수행에도 어려움을 가중시킬 것이다.
북한은 의심할 여지 없이 비열한 정권이고, 미국에 가장 나쁜 적이다. 협상이 실패한 데는 북한에도 미국과 같은 정도로 책임이 있다. 그러나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동결키로 한 1994년 북·미간 제네바합의를 준수해 왔다. 미사일 실험도 중단했다. 북한이 다른 대량 파괴 무기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1987년 이후엔 테러를 자행했다는 증거가 없다. 부시의 발언은 힘에 기반한 대북 정책을 시사하고 있다. 워싱턴에는 북한 정권의 붕괴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남북 통일은 한국인들에겐 절실한 바람이다. 북한의 경제적 실패가 붕괴로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부시의 정책추진은 한반도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부시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미사일 방어(MD)체제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특수한 현실이 있다. 북한은 수십만명을 죽일 수 있는 약 1만발의 로켓을 서울을 향해 겨누고 있다. 여기에 대해선 경고나 방어가 없다. 북한과의 협상은 비록 지루하고 초조하더라도 꼭 필요한 것이다.
부시는 그동안 북·미 협상에서 이뤄진 성과를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한국의 광범한 정치적인 여론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손상시켰다. 그는 다시 한번 많은 한국인들에게 미국이 '통일의 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정리=주정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