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대출 '주의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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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31일 "은행의 가계대출이 늘어나는 것은 은행에 새로운 위험 요소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금융감독원은 이에 맞춰 은행들에 가계대출이 부실해질 것에 대비해 대손충당금을 많이 쌓도록 지시했다.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도 최근 "가계대출이 많은 은행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말했다. 금융회사들이 너나없이 가계대출에만 열을 올리는 데 대해 금융당국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지난 몇년간 급증한 가계대출이 아직 위험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추세가 계속되면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게 금융당국의 시각이다.| ◇긴장하는 금융당국=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현재 일반은행의 전체 여신에서 가계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47.3%에 이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1999년 말 34.3%였던 은행의 가계대출 비중이 2000년 말 39%로 상승한데 이어 지난해 8.3%포인트나 급등한 것이다.
특히 은행들의 가계대출 증가가 두드러진다. 지난해 9월 말 기준으로 은행권의 가계대출 잔액은 1백37조원으로, 1년 전에 비해 40%나 늘어났다. 소매영업에 치중한 결과다.
금융당국은 가계대출 급증으로 기업대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과 가계대출이 부실해질 가능성 두 가지를 우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말 한빛은행을 제외한 모든 시중·지방 은행들에 대해 가계대출과 관련해 조치를 내렸다.금감원 관계자는 "각 은행에 충당금 적립 규모를 상향조정하도록 했다"며 "특히 은행들이 부동산 담보대출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갑작스러운 부동산가격 하락에 대비토록 했다"고 말했다.
가계대출과 신용카드채권(현금서비스·카드론 등)의 연체대출금이 많거나 부실에 대비해 쌓아놓은 충당금 적립 수준이 낮다고 판단한 것.
또 한국은행은 가계대출이 과도한 은행들에 대해선 총액한도 대출을 줄이기로 했다. 총액한도 대출이란 은행에 중소기업 대출에 쓰라며 한국은행이 싼 이자(연 2.5%)로 빌려주는 정책자금이다. 전철환 한은 총재는 최근 은행장들에게 "가계대출이 급증하면 기업 쪽 대출이 잘 이뤄지지 않고 가계대출마저 부실화할 가능성이 커져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가계대출이 증시와 부동산시장 거품을 조장하고 물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등 위험수위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개인 파산도 대비해야="가계대출의 급증으로 외부 금융환경이 갑자기 변할 경우 개인파산의 위험이 큰 만큼 대비책을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
금융연구원 최공필 선임연구위원은 이날 은행회관에서 열린 '가계 금융부채 현황과 문제점'에 관한 세미나 주제발표에서 이렇게 밝혔다.
가계 대출이 급증한 원인에 대해 崔위원은 "은행들이 금융위기 이후 기업금융 위주에서 안정성과 수익성이 높은 가계부문의 대출을 늘렸고, 가계 입장에서는 저금리에 따른 자금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최근의 가계대출 증가를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다만 은행들이 기업대출을 늘리지 않는 것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그는 "지금까지는 가계부문의 부채증가가 경기 진작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다"면서도 "은행들의 과도한 대출경쟁은 신용경색과 기업대출 기피로 이어져 장기적으로는 경기침체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그는 ▶금융당국의 금융부문 건전성 감시 강화▶소비자워크아웃제 도입▶은행의 개인신용평가시스템 개선 및 대출심사 강화▶회계제도 투명성 등을 통한 기업금융 활성화▶카드사의 무자격자에 대한 카드발급 방지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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