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전교조 교육감 ‘시식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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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특히 교육감 선거 결과에 주목하고 싶다. ‘이념 투표’ 현상이 두드러진 가운데 보수 후보들이 자체 분열로 진보에 월계관을 씌워준 꼴이 됐기 때문이다. 흔히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번 선거만큼은 보수가 공정택 전 교육감으로 대표되는 ‘부패’ 이미지에 ‘분열’이라는 맛난 고물까지 얹어 상납한 모양새가 됐다. 수원수구(誰怨誰咎). 자업자득이다.

수도권 교육감 선거에 출마했던 한 교육계 인사의 탄식이다. 그는 “지금 이대로는 전교조 후보에게 필패(必敗)”라며 다른 보수성향 후보들에게 단일화를 제안했다. 다들 찬성했지만 속내는 하나같이 ‘나를 중심으로 단일화’였다. 여론조사를 기준으로 삼기로 하자 한 후보는 A신문의 조사 결과를, 다른 후보는 B신문 조사 결과를 서로 고집했다. 자신에게 유리한 숫자들이었다. 여론조사 설문에 후보의 경력을 포함하느냐 마느냐를 갖고도 맞섰다. 이솝 우화의 ‘여우와 두루미’ 같은 옥신각신 끝에 “당신들(나머지 후보)이 단일화만 해준다면 나는 후보직을 사퇴하겠다”고 제안했다. “사퇴하라. 꼭 단일화하겠다”고 그들은 약속했다. 곧바로 헌신짝이 됐다. 결과는? 보수 후보들의 공멸(共滅)이었다.

야당 바람과 보수의 분열 외에 현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교육개혁에 대한 교사들의 반발도 요인이라고 한다. 시국선언 교사들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채 나오기도 전에 중징계를 밀어붙인 일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교장공모제를 너무 서둘렀던 정책상의 졸속도 한몫했다. 그러나 이것뿐일까.

나는 이 모든 요인을 넘어, 유권자들이 ‘전교조 교육감’을 한번 써보려고 선택한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본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전국적으로 6명, 특히 서울·경기·강원도의 교육감 자리가 진보 진영에 넘어간 ‘사건’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고, 막말이 용서된다면 “그래, X인지 된장인지 어디 한번 찍어 먹어보자”고 나선 것이다. 이미 강원도 교육감 당선자는 “다음 달 취임하자마자 고교평준화 작업에 들어가 2012년에 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곳곳에서 학력평가가 중단되고, ‘학생인권조례’라는 것이 제정되고, 일방적인 친북·이념교육이 버젓이 진행될지도 모르게 됐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교사 간, 학생 간 경쟁이 사라진 학교에서 있는 집 아이들만 하교 후 ‘조용히’ 사교육을 받고 좋다는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어쩌랴. 유권자들이 이미 ‘찍어 먹어보기로’ 작정한 것을.

다행히 판도라의 상자에는 ‘희망’이라는 마지막 요정이 남아있었다. ‘전교조 교육감 시대’의 선순환(善循環) 코스에 대한 기대다. 보수·진보 교육감들이 각자 ‘우리 아이 잘 키우기’ 경쟁을 하는 것이다. 시시콜콜 간섭하고 툭하면 시·도 교육감 회의를 소집해 윽박지르고 예산 갖고 을러대는 교육부 눈치 안 보고 교육소비자인 주민들 눈치만 보며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풍경이다. 교육부 아닌 주민에게 책임지는 교육행정이다. 사실 이런 모습이 교육자치의 본래 목적이긴 하다. 그러나 전교조의 지금까지의 행태를 보면 선순환을 기대하기 어렵게 돼 있다. 역시 직접 찍어 먹어보고 맛을 느껴볼 수밖에 없는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