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소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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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희덕(1966~) '소리들' 전문

승부역에 가면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구름 옮겨가는 소리

지붕이 지붕에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뒤척이는 길 위로

모녀가 손 잡고 마을을 내려오는 소리

발 밑의 흙이 자글거리는 소리

계곡물이 얼음장 건드리며 가는 소리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아지

다시 고개 돌리고 여물 되새기는 소리

마른 꽃대들 싸르락거리는 소리

소리들만 이야기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겨울 승부역

소리들로 하염없이 붐비는

고요도 세 평


'고요'는 아무 소리가 없는 적막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소리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침묵의 소리다. 마음속에서는 활발하게 움직이지만 귀에서는 들리지 않는 소리다. 구름이나 지붕, 마른 꽃대들처럼 아무 소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들이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소리다. 그 활기찬 삶의 소리를 찾아내는 마음의 소리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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