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품 할머니' 마을 공부방 남기고 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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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서울 성동구 용답동 동사무소 지하에 문을 연 30석 규모의 청소년 공부방 한쪽 벽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이 공부방은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어렵게 살다가신 고(故) 홍종례 할머니께서 동네 청소년을 위해 기증하신 시설입니다."

25년간 용답동에서 살다 지난해 11월 사망한 홍종례(洪鍾禮.당시 69세)할머니. 1989년 남편과 사별한 후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아온 할머니는 폐지.빈병 수거 등을 하며 평생 모은 3천여만원을 동네에 기증했고, 이 돈으로 공부방이 탄생했다.

洪할머니는 동사무소에서 매달 26만여원의 생활비를 지급받아온 기초생활 수급자로 10여년 전부터 매일 동네를 돌며 폐지와 빈병 등을 모아 고물상에 파는 일을 했다. 종이 값이 박해 한달에 1만원을 넘기기 힘든 벌이였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천식.당뇨.고혈압을 앓아온 洪할머니는 지난해 8월 건강이 악화되자 자원봉사 가정도우미 유종순(柳鍾順.39.여)씨를 불러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지만 동네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다"는 유언장을 작성, 동사무소에 내게 했다.

가재도구와 옷가지 등은 이웃들이 버리는 것을 주워다 사용했던 洪할머니가 모은 재산은 반지하 셋방 전세금 2천만원과 1천2백만원이 든 통장. 할머니는 폐품 수집 외에도 명절 때 동사무소.사회단체 등에서 위문품으로 주는 농협상품권.라면.휴지를 쓰지 않고 柳씨에게 돈으로 바꿔 오라고 시켜 이 돈을 모았다.

할머니의 유산 처리를 놓고 고심하던 동사무소측은 유난히 아이들을 예뻐했던 할머니를 생각해 책상과 의자를 구입해 공부방을 만들었다.

洪할머니는 의학실습용 시신이 모자란다는 얘기를 듣고 시신도 장기기증본부에 기증했다.

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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