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션와이드] 10년만에 돌아온 거제 은빛 대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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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6일 오전 5시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외포항.

사방이 어둠에 묻혀 있지만 소형어선 20여척의 엔진소리가 요란하다.10여분이 지났을까 엔진을 달군 배들이 새벽 바다를 헤쳐 나가기 시작한다.주로 5t 미만인 어선들이 도착한 곳은 외포항에서 30여분쯤 나간 거제도 앞바다.

그물 위치를 표시해 놓은 부표를 확인한 어부들은 익숙한 솜씨로 그물을 끌어 올렸다.불빛을 밝힌 채 그물을 끌어 올리자 배가 좌우로 흔들려 마치 그네를 타는 듯했다.

그물 속에는 대구 ·아귀 ·메기 ·장어 등이 퍼덕거렸다.그 중 대구가 유독 하얗게 반짝거렸다.어느새 갑판에는 금세 잡아올린 물고기들이 수북이 쌓였다.이 중 대구는 귀족 대접을 받는다.어민들은 작업을 마칠 때까지 대구를 어창에 소중히 넣어둔다.

2시간여작업을 마친 배들은 외포항에 귀항,거제수협 외포위판장으로 물고기를 운반했다.

매일 오전 8시30분부터 중매인과 어민 등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시작되는 위판에서도 대구는 인기다.대구가 상장되면 중매인들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고 눈빛이 달라지며 긴장이 고조된다.

같은 가격을 제시한 중매인들끼리 가위 ·바위 ·보로 대구의 주인을 정하는 진풍경도 자주 벌어진다.대구 가격은 암수에 따라 50∼60㎝ 짜리 7만∼9만원,70㎝ 이상은 10만∼15만원으로 어민들의 큰 소득원이 되고 있다.

위판장 앞에는 부산 ·마산 ·진주 등에서 온 활어운반 차량과 자가용 등 50여대가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마산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김철로(56)씨는 “거제 앞바다에서 잡은 대구는 생태탕 재료로 최고”라고 말했다.거제 대구는 북태평양까지 회유하기 때문에 운동량이 많아 육질이 졸깃하고 산란기의 풍부한 영양분 등으로 미식가들을 유혹한다.

오전 11시쯤 위판이 끝나자 활어 운반차량들은 뿔뿔이 사라진다.부산 ·경남지역 식당들에 신선한 대구 ·메기 ·아귀 등을 배달하기 위해서다.

80년대까지 대구잡이 어항으로 명성을 날렸던 외포항이 되살아 나고 있다.10여년간 거의 잡히지 않던 대구가 2000년 1월에 9백30여마리가 잡힌 이후 지난해 1월 포획량이 1천3백여마리에 이르는 등 활기를 되찾은 것.올해도 어획고가 2천 마리는 될 것으로 주민들은 예상하고 있다.

80년대 이 곳에선 연간 1만마리 정도의 대구가 잡혔었다.그래서 당시 “외포항엔 개도 5천원 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경기가 좋았고 집값도 거제도에서 가장 비쌌다.하지만 낙동강 하구둑이 세워진 90년부터 어획량이 줄어들어 99년까지 고작 수십마리가 어획량의 전부였다.

10년 세월만에 다시 맞은 활황에 외포리 주민들이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기대감에 들떠 있다.외포항 입구에서 20여년째 대구 전문식당을 운영해 온 중앙식당 李길란(60)할머니는 “대구가 혈액 순환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마산 ·부산에서도 생태탕을 먹으러 온다”고 말했다.

李씨는 새벽마다 중매인인 남편 朴명남(63)씨와 위판장에 나가 대구를 구입,식당에서 쓰고 남은 것은 두 아들이 활어운반차량을 이용,외지로 팔러 나간다.

또 대구를 잡을 수 있는 어업 허가권(정치성 구획어업)의 가격이 폭등했다.대구가 안잡힐 때는 50만원에도 살 사람이 없었으나 지금은 5백만∼1천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대구는 산란기인 1월 한달간 전국적으로 잡을 수 없지만 외포항 앞바다 일정구역(가로 2.8㎞ ·세로 3.5㎞)에서만 대구알 방류사업용으로 포획이 허용된다.

따라서 거제산 대구가 다른 지역에서 판매되려면 거제시장이 확인한 반출증이 있어야 한다.반출증 없는 생대구는 불법으로 잡은 것으로 보면 된다.

거제=김상진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 왜 많이 잡히나

거제도 근해로 대구가 다시 돌아온 것은 대구알 방류사업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경남도 김석상(金石尙)어업생산과장은 “거제도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뀐 점이 없는 것으로 미뤄 16년 동안 꾸준히 펼쳐온 대구 인공수정란 방류사업의 효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제수협 ·경남도는 해마다 4천여만원∼1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대구 인공수정란 방류사업을 해오고 있다.

대구의 산란기인 매년 1월 외포위판장에는 거제수산관리소 주만성(45)지도계장과 거제수협 김성호(30)씨 등 3명이 매일 나와 산란을 앞둔 암컷 5마리에 수컷 1마리꼴로 수매,인공수정시킨 뒤 곧바로 외포항내 인공어초 주변에 방류하고 있다.

1986년 1천5백여마리의 대구를 잡아 17억여개의 수정란을 방류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약 7조개의 인공수정란을 방류했다.

수정란 방류가 성과를 거두자 경남도는 최근 한국해양연구원에 방류 효과를 더 높이기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연구원측은 수온에 따른 인공수정란 부화율,효과적인 방류방법,대구 치어생산기술 등을 내년 6월 말까지 연구할 계획이다.

*** 父子어부 전순탁 ·길부씨

외포 어촌계 전순탁(全順鐸 ·60)계장과 아들 길부(吉夫 ·30)는 어촌계원 65명 중 유일한 부자(父子)어부다.이들 부자는 매일 오전 5시,오후 1시 등 두차례 어김없이 대구잡이에 나선다.

아버지는 선친으로부터 정치성 구획어업 허가권을 상속받아 25세 때부터 대구잡이에 나섰으니 3대가 대구잡이에 종사하는 셈이다.길부씨는 조선소에 다니다 3년 전부터 아버지를 돕기 위해 회사를 그만뒀다.

全씨는 4t 짜리 소형어선으로 외포항 앞바다에 대구 회유 길목에 그물을 설치해 고기를 잡아 1남4녀를 모두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켰다.

그는 “대구잡이가 한창이던 80년대에는 바다로 나가는 것이 그렇게 신날 수 없었는데 90년대 들어 낙동강 하구둑이 생기면서 어획량이 확 줄어 참 답답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대구 풍어에 全씨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지고 있다.

全씨는 3년 전에는 연간 3천여만원어치의 소득을 올렸으나 대구가 잡히기 시작한 지난해부터는 소득이 5천여만원으로 껑충 뛰었다고 귀뜸했다.마을 전체 어획고도 지난해부터 30억원으로 늘어났다.

4년 전 어촌계장을 맡으면서 위판장을 만들어 중간 상인들의 횡포를 막고 고기 제값 받기를 정착시킨 그는 “대구알 방류사업이 확대되고 방파제를 잇는 도로가 확충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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