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2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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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검사의 길

19. 첫 법무부 근무

1976년 3월 어느날 정해창(丁海昌)법무부 검찰국 제1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인천지청에 근무한지 6개월쯤 지난 무렵이었다. 검찰1과에 근무하던 박철언(朴哲彦)검사가 미국유학을 가서 빈자리를 메워야 하겠는데 검찰국에 서 근무할 의향이 없느냐는 의사 타진이었다.

丁과장은 또 "허형구(許亨九.전 검찰총장.법무부장관) 검찰국장도 金검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더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당시 許국장은 나와 같은 부산대 출신이다. 전화를 받고 망설였다. 고등고시 14회인 내가 검찰국 과장이 아닌 검사로 근무하기에는 서열상 좀 늦은 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최상엽(崔相曄.전 법무부장관) 검찰2과장과 서정신(徐廷信.전 법무부차관) 3과장은 고등고시 13회 출신이었고 김유후(金有厚.전 서울고검장) 4과장은 나보다 시험 1년 후배인 고시 15회 출신이다. 검찰국으로 갈까 한다는 내 말에 인천지청 동료검사들은 "거기는 무엇하러 가느냐. 퇴근시간도 일정치 않은 곳이고 고생하는 곳이니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만류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해창 1과장의 제의를 수락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처럼 학연과 아무런 빽도 없는 지방대학 출신이 인사 때마다 불안하고 신경이 쓰이는 것 자체가 싫었다. 초임으로 서울지검에 발령을 받은 이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지방을 떠돌다가 인사에 혜택을 준다는 우수 논문을 써서 장관 표창까지 받았음에도 인천지청으로 발령 받아 인사에 관한 한 이미 지쳐 있었다.

결국 검찰 인사의 주무부서인 법무부 검찰국에서 유능한 선배들과 함께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받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고등고시 후배가 이미 검찰국 과장을 하는 상황에서도 검찰1과 검사 자리를 수락했다.

이에 앞서 75년 가을 나는 서울지검 인천지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족과 함께 지내던 고향 마산에서 서울로 곧바로 이사를 빨리 할 수 없어서 우선 나 혼자 상경해 서울 신당동에 있는 동서 집에서 출퇴근을 했다. 매일 신당동에서 동대문까지 걸어가서 인천 주안동까지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일이 보통 고단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출퇴근이 힘들기도 하였지만 법무부장관으로부터 우수논문상을 받은 검사를 원하는 근무지로 보내주기로 한 제도를 무시하고 서울지검이 아닌 인천지청으로 발령낸 인사권자들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근무 의욕이 좀처럼 나지 않았다. 퇴근시간의 전철은 출근시간대와 마찬가지로 콩나물 시루 같았다. 자연히 퇴근시간이 되더라도 사무실에 남아 일을 하던지 아니면 청사내 테니스 코트에서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인천지청 검사들은 대부분 전철을 이용해 서울에서 출퇴근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범죄 정보 등 관내 사정에 어두웠다. 그래서 대부분 송치사건들이나 열심히 처리하는 형편이었다.

나도 송치사건만 지게꾼같이 처리하자니 일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생각 끝에 무고 사건을 집중적으로 수사하기로 마음먹고 고소.진정 사건을 처리하면서 인지되는 무고사범들을 하나하나 구속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청이나 끈질긴 투서꾼이나 악질적인 무고 사범들은 있기 마련이다. 검사들이 고소.고발.진정 사건들을 무혐의 처리하면서 귀찮으니까 대개 '무고혐의 없음'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업무처리 태도다. 약 6개월 동안 무고 사범 20여명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서류 보따리를 들고 수년간 검찰청과 법원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검사 등을 괴롭혀온 상습 투서꾼도 더러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무고사범같이 쉬운 수사도 없는 셈이다. 다른 수사와 같이 피의자와 다툴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은 수사기록에 다 있으니까 수사하기가 어렵지 않다.

다만 고소 사건을 처리하면서 또 다른 일을 만들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귀찮은 일이고 상습 투서꾼들로부터 투서나 모함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검사들에게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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