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지리산 자락에 6가구 귀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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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리산 자락 해발 4백50m에 위치한 경남 함양군 병곡면 광평리 다볕마을. 도시생활을 접고 여섯가구 20여명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귀농(歸農)마을'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갑자기 늘어난 귀농자 대부분은 농촌에 적응하지 못해 도시로 되돌아갔으나 이곳은 성공한 귀농마을로 자리잡았다.

천왕봉부터 노고단까지 1백리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다볕마을의 아침은 고요하다. 도시였다면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출근 준비에 온 집안이 들썩거릴 시간이지만 이 마을엔 출근시간이 없다. 스스로 모든 일을 계획하고 각각 맡은 농작물을 알아서 키우면 그만이기 때문에 퇴근 시간도 없다. 다만 퇴비.죽염.땔감 만들기 등 미리 정해진 공동 작업 때에는 시간에 맞춰 꼭 참여해야한다.

마을 한켠에는 아이들을 위한 트램펄린.미니풀장 등이 있다. 어른들이 일하는 동안 방학 중인 아이들은 마음대로 뛰어 논다. 농장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는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다볕마을의 역사는 97년 말 외환위기 직후 15가구 30여명이 6만여평의 밤산을 사들여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밤산을 개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지금은 2만여평에서 벼.배추 등을 재배 중이다.

주민들은 또 틈틈이 만든 다슬기 청.무청.홍화씨와 유황오리를 판매한다. 다슬기 청은 마을사람들이 지리산 뱀사골 계곡에서 다슬기를직접 잡아와 3박4일 동안 우려내 만든다. 무.홍화는 자연농법으로 직접 재배한다. 양계장에서 얻어온 닭똥에다 풀을 베어 넣어 만든 퇴비를 주고 농약.비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유황오리는 사육장에는 음악을 틀어줄 정도로 세심하게 키운다. 오염되지 않은 지리산 자락 상품이어서 소비자들의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이 지금처럼 평온한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밤산을 개간하기 시작하자 밤산 계곡에서 식수를 끌어다 먹던 아랫마을 사람들의 반대 시위가 이어졌다. 아랫마을에서 매일 개간을 방해했지만 새로 판 지하수의 전기료를 부담해주는 등 노력 끝에 이제는 둘도 없는 이웃사촌이 됐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귀농한 주민들 사이의 갈등. 한때 20여가구 40여명이 모여들었으나 귀농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농촌을 도피처로 삼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면서 초기 귀농인구 14가구가 나가고 5가구가 새로 들어오는 진통을 겪었다.

곡절이 많았던 만큼 주민 구성도 다양하다.서울 중소기업체에서 근무하던 정진호(43)씨는 부인과 여덟살난 아들을 데리고 4년 전에 합류했다. 정씨는 큰 돈 없이 귀농할 곳을 찾기 위해 전국을 2년 동안 돌아다니다 이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서울 대기업체 연구원 자리를 박차고 내려온 양창석(47)씨는 귀농을 반대하는 가족들을 놔두고 2년 전부터 혼자 와 있다.

서울에서 컴퓨터 부품회사를 운영하다 실패하고 들어온 박모(41)씨는 한때 수억원대의 재력가였다. 박씨는 다볕마을 홈페이지(http://www.dabyut.co.kr)를 운영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기업체 사장부터 밑바닥 노동자까지 천차만별의 삶을 살아왔지만 이곳에서는 평등한 농부일 뿐이다.

김윤옥(43.여)이장은 "도시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 농촌이 아니다"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함양=김상진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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