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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할 구분돼야 진짜" 발언에 국내 레즈비언들 반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놓고 여성학계와 관련 단체들의 논쟁이 말띠해 원단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레즈비언의 성역할을 인정하느냐 여부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이 논쟁이 '여성신문'과 그 홈페이(http://www.womennews.co.kr)에서 몇달째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성 차이는 여성억압으로 인식되고 있는 마당에 레즈비언도 성역할을 인정할 경우 여성주의적 대안을 모색하는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논리적으로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단은 지난해 11월 한국여성학회(회장 조옥라)가 개최한 추계발표대회에서 한국외국어대 강사 강숙자박사(여성학)가 발표한 '레즈비언 여성주의의 비판적 검토'라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이성애(異性愛)적 모델에 따라 펨(femme:여성역할)과 부취(butch:남성역할)가 나뉘는 참 레즈비언'과 '성관계는 없어도 이론상으로 레즈비어니즘을 주장하며 급진적으로 남성타도를 주장하는 정치적 레즈비언'을 구분하고 후자가 한국여성을 위한 보편이론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한데서 시작됐다.

성모델에 따라 성관계를 맺는 참된 레즈비언을 대변하기 보다 성차이의 폐기를 주장하며 사실상 여성우월주의를 옹호하는 급진적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여성학의 방패 뒤에 살짝 숨은''무임승차자'라고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94년 창립해 현재 약 6백여명의 회원이 참가한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가 '여성신문'을 통해 이는 철저하게 동성애혐오증(Homophobia)이라고 비난하고 나서면서 여성학계 및 관련단체 전체가 이 논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가장 먼저 11월 22일자(653호)에 발언대를 통해 '성관계 여부로 레즈비언임을 확인하는 것은 성교중심적'이라며 이는 곧 '한국 레즈비언의 존재를 삭제하는 무례함을 저질렀다'고 비판하고 이 논문을 여성학회 자료집에서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강박사는 지난해 12월 자신은 성적 소수자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하지만 여성우월주의가 아닌 남녀평등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며 '정정당당하게 실명으로, 이론으로 반론을 제기할 것'을 당부했다. 이어 한국여성학회도 연구위원장 송승영교수(동덕여대.여성학)의 명의로 '발표된 논문에 대한 어떤 비판도 개방되어있다'며 '학회에 등록해 공식적인 채널을 이용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요지의 답변을 실었다.

그러나 논쟁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 오히려 지난해말 조순경교수(이화여대.여성학)가 '전문가 여성학자의 이론이 비전문가 레즈비언의 상식보다 우월하다는 근거가 없다'며 '끼리끼리'를 옹호하고 나서 논쟁은 여성학계 내부로 확대되었다.

'끼리끼리'는 '한국 레즈비언에 대한 오해와 멸시, 차별'이 깔려있다며 강박사와 한국여성학회의 사과와 '성정체성과 차별' 교육을 권하는 반박문을 다시 게재한데 이어 회원 한사람의 주석이 달린 긴 비판 논문을 덧붙어 실었다. 이 논문을 통해 레즈비언의 성구별은 '남성중심의 성억압에 대항하기 보다 이성애만을 절대화하고 다른 성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주변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며 강박사가 정서적.사회적.신체적 역할 구분없는 다수의 레즈비언의 생활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최근에는 부산경남의 '안전지대'가 또 이 논쟁에 가담하면서 강박사와 한국여성학회를 압박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자는 "이 논쟁은 페미니즘 내부의 차이가 반영된 것"이라며 "앞으로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성적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사회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가 될 것"이라 예견했다.

김창호 학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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