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소의 전설’ 성대한 장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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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4일 오전 경남 의령군 의령읍 만천리 만하마을 진입로. 끈으로 묶은 커다란 관을 들어올린 채 이동하는 포클레인 뒤를 100여 명의 마을 주민이 따른다.

포클레인은 마을에서 500m쯤 떨어진 과수원에 도착해 구덩이를 판 뒤 관을 넣고 흙을 덮었다. 주민들은 돌아가면서 “범이(사진)야 잘 가라”며 술을 뿌렸다. 이어 ‘무적신화 범이의 무덤’이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우리나라 싸움소의 지존 ‘범이’의 장례식 모습이다. 국내에서 소의 장례식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일반적으로 소가 자연사하면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의해 수의사가 검안한 뒤 전염병이 아닌 경우 땅에 묻는다. 죽은 소는 도축장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범이는 기력이 다해 22일 자연사했다. 나이는 17살.

소 주인 하영효(72)씨는 “범이가 죽으니 가족을 잃은 것 같아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고 말했다. 250만원을 들여 오동나무 관을 짰다. 그는 3일장을 하는 동안 범이가 머물던 축사에 200여 개의 우승기와 트로피를 진열해 놓고 애도했다. 범이는 지난해 10월 4일 의령군에서 열린 제6회 추석맞이 소싸움대회에 마지막으로 출전한 후 기력이 떨어져 누웠다. 범이는 통산전적 191전 187승 4패로 국내 투우계에서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다. 전국대회 19연속 우승 기록은 당분간 깨지기 힘들 것이라는 게 투우협회의 평가다. 범이가 주인에게 안겨준 상금만 1억5000여 만원이 넘는다. 범이는 주특기인 ‘목 감아 돌리기’(서로 마주친 뿔을 좌우로 돌려 비틀기)로 상대 소를 제압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범이는 죽었지만 2세가 곧 태어날 예정이다. 하씨가 1월 범순이(6살)를 구매해 신접살림을 차려 주었는데 새끼를 뱄기 때문이다. 새끼는 연말께 태어날 예정이다. 한편 의령군이 범이의 혈통을 잇기 위해 2006년부터 냉동 보관해 온 범이의 정액은 활력도가 떨어져 거의 못 쓰게 됐다. 때문에 연말 태어날 범이 2세가 국내 싸움소 지존의 유일한 핏줄이 될 전망이다.

의령=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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