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자린고비' 오명씻은 한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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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익을 나눌 줄 모르는 스크루지'로 불렸던 뉴욕의 한인들이 모처럼 훈훈한 세모(歲暮)를 맞고 있다. 미 주류사회가 한인들이 베푼 선행에 감복, 고맙다는 찬사를 잇따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최근 9.11 테러 피해자를 위해 한인 사회가 거둔 성금을 전달받고는 "한인사회의 온정에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화답했다. 다른 민족들이 성금을 전달했을 때 볼 수 없었던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한인들은 지난 9월 모금을 시작한 지 사흘도 안돼 1백만달러(약 13억원)를 거둘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줄리아니 시장은 '사랑의 터키(칠면조) 한.미재단'이 불우이웃돕기에 써달라며 칠면조 3백마리를 기증했을 때도 관계자를 직접 만나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는 뉴욕 한인경제인협회 회원들이 테러 피해자를 위해 3만달러의 성금을 적십자사에 기부한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신문은 테러 이후 애국심을 미끼로 3~5배의 폭리를 취한 악덕기업들이 많은 데도 한인들은 '바가지 씌우지 않기' 캠페인을 벌여 다른 민족 상인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소개했다.

지난달에는 뉴욕 퀸즈 자메이카에서 식품점을 운영하는 정성은씨가 인근업소에서 총격을 가하고 도주하던 2인조 흑인강도를 맨손 격투 끝에 붙잡아 현지 언론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동안 한인들은 열심히 일하긴 하지만 지역사회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민족으로 비춰졌다.

그런데 최근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누에가 허물을 벗듯 과거의 '자린고비' 이미지를 서서히 떨쳐 버리고 있다.

물론 미국의 한인들 전부가 인색하고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온 것은 아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 모르도록' 음지에서 많은 선행을 베풀어 온 사람들도 무척 많다.

하지만 이민 1백년 역사 속에서 전체적인 한인들의 인상은 구두쇠로 낙인찍혀 버렸고 숱한 선행은 그늘에 묻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올해 뉴욕 한인들이 생생하게 보여준 '더불어 사는 삶'은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이 새롭게 자리매김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방인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주류사회에 동참하는 첫 걸음이라고나 할까.

신중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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