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경제] 유럽, 같은 돈 쓰면 어떻게 달라질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만약 우리나라와 중국.일본이 같은 돈을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불편한 점도 많겠지만 재미있는 일도 많이 생길 것입니다. 도쿄나 베이징에 가서 환전할 필요 없이 물건을 사고 만원짜리 지폐를 냈을 때 가게에서 거스름돈을 내주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신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이 앞으로 열흘 남짓 뒤부터 유럽에서 벌어진답니다.

유럽연합(EU)에 가입한 15개 나라 중 12개 나라가 새해부터 '유로'라는 새로운 돈을 쓰기로 했거든요.

몇몇 나라는 내년 초 수개월간은 유로와 함께 지금까지 써온 자기 나라 화폐도 사용하게 하지만 그마저 수개월이 지나면 모두 폐기하기로 했답니다. 독일의 마르크, 프랑스의 프랑, 이탈리아의 리라 등이 아예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하지만 EU에 가입한 모든 나라가 유로를 쓰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스웨덴.덴마크는 일단 유로를 쓰지 않기로 했어요. 자기 나라 돈에 대한 애착이 강해, 또는 나라 경제를 마음대로 운용하기 어려울까봐 거부했지요.

새 돈을 쓰기로 한 나라들을 공식적으론 '유럽통화동맹(European Monetary Union)'으로 부르지만 흔히 '유로 랜드(Land)' 또는 '유로 존(Zone)'이라고 합니다.

새 돈이 쓰이면 당장은 불편한 점이 많을 거예요. 종전에 쓰던 돈을 바꾸는 것만 해도 보통일이 아니에요. 시민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돈을 일정 기간 이내에 은행에 가서 바꿔야 한답니다.

나라에 따라서는 수수료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은행들은 갑자기 일이 폭주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거예요.

기업들은 모든 제품의 상표에 값을 '유로'라는 새 돈으로 표기해야겠지요. 상인들은 자기 나라 돈으로 표기되는 저울을 모두 새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도 유럽 여러 나라들은 화폐 통일에 찬성했어요. 많은 전문가들은 이를 '언어통일'에 비유한답니다. 같은 돈을 쓰게 되면 언어가 하나가 됐을 때처럼 불편함이 없어진다는 것이지요. 돈을 바꿀 일이 없으니 환전 수수료를 낼 필요도 없고요.

몇년 전 유럽의 한 연구소가 재미난 실험을 했어요. 유럽연합(EU)에 가입한 15개 나라를 돌며 독일 돈 1천 마르크(약 59만원)를 각 나라 돈으로 바꿔본 거예요. 그리고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요.

1천 마르크를 15개 나라 돈으로 바꾸는 비용(환전비)이 5백 마르크가 넘었던 것이지요. 당시 유럽 여러 나라들은 이 사례를 들며 왜 화폐를 통일해야 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나라마다 들쭉날쭉한 가격이 하나로 표시되면 물건값도 자연히 내려가게 됩니다. 1.5ℓ짜리 코카콜라 한 병 값을 비교해 볼까요? 독일에서는 3.02마르크, 룩셈부르크에서는 42 룩셈부르크 프랑, 스페인에서는 1백25 에스쿠도에 팔리고 있어요. 이래서는 값 차이를 쉽게 비교할 수가 없지요.

이것을 유로로 표시해 볼까요? 독일에서는 1.57 유로, 룩셈부르크에서는 1.06 유로, 스페인에서는 0.77 유로에 팔리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답니다. 코카 콜라가 스페인에선 독일의 절반 값으로 팔리고 있는 거예요. 또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을 때 덴마크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보다 돈을 두 배로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이나 덴마크 소비자들이 가만 있지 않겠지요? 코카 콜라나 맥도널드 회사에 항의를 할 것이고, 그러면 값을 내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어느 나라 소비자든 더 싼 값에 상품을 살 수가 있게 되지요.

기업들이 얻는 이익도 적지 않아요.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로 돈을 바꾸는 데 한 푼도 들지 않지요. 유로 랜드에 포함된 나라의 지사에 돈을 보낼 때 적지 않은 돈을 아낄 수 있을 거예요.

더 큰 혜택도 있습니다. 아주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기업들은 무역량이 늘어날수록 다른 나라의 화폐 가치가 자꾸 바뀌는 데 큰 부담을 느끼게 되요.

다른 나라와 돈을 바꿀 때 그 값(환율)이 자주 바뀌면 언제 수출하고, 수입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매우 어렵지요. 환율로 인해 기업은 예상치 못한 큰 손해(환차손)를 볼 수도 있어요. 독일경제인연합회는 유로 출범으로 독일 기업들이 연간 12조~24조원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시장규모도 엄청나지요. 3억4천만명의 인구에,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6%와 무역의 20%를 차지해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랍니다.

각 나라의 중앙은행이나 기업들도 유로를 더 많이 가지려고 할 거예요. 세계적으로 힘이 자꾸 커지기 때문이지요. 아직은 각 나라 정부가 갖고 있는 외국 돈(외환보유액)에서 유로는 11%에 불과하지만 전문가들은 1~2년 안으로 20%를 넘을 것이라고 해요.

국제 금융 기구에서도 발언권이 커질 것이 뻔합니다.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을 넘어섭니다.

우리 나라 기업들은 이같은 변화에 위협과 기회를 동시에 느끼고 있어요. 겉으로 보기엔 불리한 점이 많습니다.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가운데 유럽 기업들은 경비를 절감할 수 있지만 우리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기회일 수도 있어요. 큰 시장이 생겼으니 가만 있을 수 없지요. 유로화 출범으로 전문가들은 특히 유럽의 정보산업(IT)이 크게 성장할 것으로 본답니다. 이 분야에서 앞선 우리 기업들에는 좋은 기회지요.

삼성경제연구소 김득갑 수석연구원은 "앞으로 유로는 달러에 버금가는 힘을 갖게 될 것이며 달러를 능가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어요.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옮겨갈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예요. 유로의 등장으로 세계경제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이재광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