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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9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그러나 이 무렵, 이처럼 태평성대를 누리는 청해진과는 달리 신라는 극도로 어지럽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 있었다.

신라가 천재지변으로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었던가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흥덕왕 7년(832년) 봄과 여름의 가뭄으로 왕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별전에서 잤으며, 통상 음식에도 상선(常膳)을 멸하고, 중외에 죄수들을 사하였다.8월에 기근과 흉년으로 도적이 도처에 일어났다. 10월에 왕이 사자를 보내 백성을 안무(安撫)케 하였다."

예부터 어떤 재변이 있으면 그것을 부덕의 소치로 여기어 임금은 자신을 책망하는 의미로 정전을 피하여 별처에 거하고, 통상시의 요리에서 가짓수를 덜고, 또한 죄수들을 풀어주는 등 여러가지 안무의 방법을 행하는 관례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해는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듬해에는 더 큰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흥덕왕 8년(833년) 봄에 국내에 큰 기근이 있었다. 10월에 살구꽃이 다시 피어나고 유행병에 죽는 사람이 많았다."

2년 연속 가뭄으로 인해 기근과 흉년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유행병까지 돌자 인심은 흉흉해지고, 각처에는 도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 일어난 도적, 그가 바로 염문이었다.그는 오늘의 광주인 무주사람이었는데, 원래부터 인근 바다에서 큰 활약을 떨치던 해상세력가였다. 그는 제법 큰 규모의 선단을 가졌던 상인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주로 노예무역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다.

노비는 그 무렵 최고의 이익을 보장하는 상품으로 염문은 주로 도서지방에서 기근이 들어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를 팔면 이를 수집해다가 중국의 해적들에게 넘기는 중간상 노릇을 했을 뿐 아니라 전성기 때는 직접 부하들을 시켜서 양민들을 약탈하여 강제로 중국의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던 전형적인 노예 무역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법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서남해안 일대의 세도가였다.

염문은 타고난 거칠고 포악한 성격으로 무자비하게 부하를 다뤘으며, 어떨 때는 직접 배를 타고 나가서 자신이 직접 노예를 약탈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방상시(方相氏)라고 부르면서 무서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염문은 노예를 약탈할 때마다 방상시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방상시란 본래 천연두의 역신(疫神)을 쫓아내는 선신(善神)으로 최치원이 지은 향가에도 그 무렵 방상시의 황금탈을 쓰고 귀신을 부리는 모습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황금빛 얼굴 그 사람이

구슬채찍 들고 귀신을 부리네.

빠른 걸음 조용한 모습으로 운치 있게 춤추니.

붉은 봉새가 요(堯)시대 봄철에 춤을 추는 것 같구나."

그 당시 최고의 공포 대상은 천연두인 역병. 이 역신을 몰아낼 수 있는 방상시야말로 착한 일을 하는 좋은 신임에도 불구하고 공포 중의 공포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잔인무도한 염문을 '방상시'라고 부르면서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염문을 방상시라고 부르는 데는 그가 죽음의 노예상인으로서 공포의 대상일 뿐 아니라 최치원의 노래처럼 황금빛 방상시 가면으로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염문은 평소에는 무주에 머물면서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위장하고 있었다. 그는 옛 백제의 악궁인(樂弓人)들이 그러했듯 자색 큰소매 치마 저고리에 선비들이 쓰고 다니던 장보관(章甫冠)에 가죽신을 신고 다니며 필률을 불고 다녔다.

필률은 오늘날의 피리와 같은 악기인데, 특히 염문은 복숭아 나무껍질로 만든 세피리의 명수였다.

그가 피리를 불면 사람들은 슬피 울고, 하늘을 날던 새들도 날개를 접고 가지 위에 앉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사람들은 무주성 최고의 악공인 염문이 사람들을 약탈하여 노예로 파는 잔인무도한 악마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아내뿐 아니라 그의 누이를 비롯한 친족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탈을 쓴 악마'였던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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