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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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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60년 11월 2일,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는 서울 명보극장에서 개봉하자마자 화제의 초점이 됐다. 하녀가 주인집 남자와의 불륜으로 중산층 가정을 파멸시키는 내용의 이 영화는 강렬한 악녀 캐릭터와 독특하고도 음울한 분위기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경북 김천에서 한 하녀가 치정 문제로 유아를 살해한 엽기적인 사건이 배경이 됐다는 점도 관심을 부추겼다.

그해 ‘하녀’는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61년 한국최우수영화상에서도 감독상과 신인상(이은심) 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이후 김기영은 ‘하녀’의 연장선상에 있는 ‘화녀’(1971), ‘충녀’(1972) 등으로 독창적인 영화세계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김기영은 서서히 잊혀졌다. 그에게 다시 조명이 비친 것은 97년 제2회 부산영화제 때의 일이다. 98년 그가 사망하자 베를린영화제는 이례적인 회고전을 마련했고, 2003년 세계적 권위의 프랑스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 장 미셸 프로동은 ‘하녀’에 대해 “제작 40년 뒤에야 이런 영화를 접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여러 영화제에서 김기영의 작품들이 집중 소개됐고, 그제야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은 세계영화재단(WCF)의 지원으로 남아 있는 ‘하녀’의 필름을 DVD로 복원했다. 덕분에 이제 ‘하녀’는 다른 한국 영화의 클래식들에 비해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영화가 됐다.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한 전도연 주연의 ‘하녀’가 이번 칸영화제에서 호평받고 있다. 새 ‘하녀’는 23일 폐막하는 이번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의 ‘시’와 함께 한국 영화끼리 수상을 다툴 전망이다. 50세를 맞은 ‘하녀’의 화려한 재기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50년 뒤에까지 영감을 잃지 않고 있는 ‘하녀’가 근 20년간 소수의 전문가 집단을 제외하고는 잊혀진 영화여야 했다는 것, 해외의 호평이 이어진 뒤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복원과 재조명이 이뤄졌다는 현실은 여전히 씁쓸한 일이다. 세간의 관심은 한국 영화가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할 때에나 올림픽 금메달처럼 환호할 뿐, 이런 영광의 초석이 됐던 어제의 고전들을 스스로 재평가하고 보존하는 데까진 미치지 못한다. 얼마나 더 많은 ‘하녀’가 먼지 속에서 잠자고 있을까.

송원섭 JES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