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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이후 아프간 어디로…] 두달만에 무릎꿇은 탈레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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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치 운동으로서의 탈레반 운동은 끝났다."

전 파키스탄 주재 탈레반 대사 압둘 자이프가 6일 이슬라마바드에서 탈레반의 투항 소식을 기자들에게 전하면서 남긴 말이다.최고 지도자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의 운명은 아직 불투명하지만 탈레반 조직의 와해는 대세로 굳어졌다.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지 꼭 2개월 만의 일이다.

탈레반이 최후의 거점인 칸다하르를 포기하고 사실상 항복함에 따라 대(對)테러전쟁은 오사마 빈 라덴 체포를 위한 막바지 단계로 접어들었다.이와 함께 미국은 대테러전쟁을 제3국으로 확대할지에 대한 결단을 서둘러야 할 시점을 맞고 있다.

◇ 투항 협상의 배경과 과정=탈레반이 2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손을 들고 만 것은 미국의 공습과 파죽지세로 남하한 북부동맹 및 파슈툰족 군벌의 협공 등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지난달 13일 수도 카불을 버리고 칸다하르에 배수진을 쳤으나 포위망이 한달 가까이 계속되면서 군수물자가 바닥나는 등 급속히 저항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융단폭격으로 탈레반의 전력을 파괴시키는 한편 중앙정보국(CIA)의 개입을 통한 파슈툰족 내부 분열 공작으로 탈레반의 파국을 재촉했다.

그 사이 칸다하르에 있던 탈레반 병사 1만명이 숨졌고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탈레반에 남은 선택은 투항 협상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탈레반은 지난주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하미드 카르자이와 접촉, 협상에 들어가 6일 칸다하르를 또 다른 파슈툰족 지도자 물라 나키불라에 양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자이프 전 대사는 "오마르는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생명과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 탈레반의 장래=1990년대의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에서 출발,한때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90%까지 장악하는 정치 조직으로 발전했던 탈레반은 오명(汚名)만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무기까지 나키불라에 넘기기로 함에 따라 조직 붕괴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탈레반의 몰락에 따라 카르자이가 수반을 맡고 북부동맹이 실권을 장악한 과도정부의 정통성이 강화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자르 이 샤리프를 장악한 우즈베크족 북부동맹 사령관인 도스툼을 비롯한 유력 군벌 가운데 일부가 과도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서 새로운 불안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 오마르를 비롯한 탈레반 핵심 관계자들의 신병 처리가 아직까지 변수로 남아 있다. 오마르의 투항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조건으로 한 것이지만 미국은 이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든 오마르를 법정에 세워 단죄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협상 자체가 깨질 가능성도 있다. 북부 쿤두즈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탈레반군의 항복 협상이 홍역을 치르며 포로수용소 참사로 연결된 사례에서 보듯 앞으로의 상황은 쉽게 점치기 힘들다. 일부 오마르 추종자들은 주변 산악지대로 들어가 게릴라전에 돌입할 가능성도 있다.

◇ 미국의 남은 과제=미국의 대테러전쟁의 당면 목표는 빈 라덴의 체포 또는 사살로 좁혀지게 됐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칸다하르의 통제권 이양으로 대테러전쟁의 초점은 빈 라덴의 색출로 좁혀졌다"고 말했다.

동부 잘랄라바드 인근 토라 보라의 산악지대에 숨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빈 라덴에 대한 추적망이 어느 정도 좁혀지면 미국은 우즈베키스탄에 주둔 중인 산악사단 정예 요원을 투입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더욱 큰 과제는 대테러전쟁의 확전 여부다.미국은 9.11 테러 참사 이후 "알 카에다를 비롯한 전세계의 테러 조직을 일망타진할 때까지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된다"고 강조해 왔기 때문에 탈레반의 투항을 계기로 미국 수뇌부들간에 확전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달 만에 미국이 탈레반 궤멸이라는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확전을 주장해 온 강경파들의 입지를 더욱 굳혀줄 가능성이 크다. 이와 함께 ▶과도정부 구성과 지원▶치안 유지을 위한 다국적군 편성▶난민 구호 같은 인도적 지원 등 산적한 과제들이 미국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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