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낙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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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문정희(1947~) '낙상' 전문

홀로의 술잔에 조금 취했던 것도 아니다

투명한 대낮 늘 다니던 골목길에서 뜻도 없이

와르르! 하늘을 한쪽으로 밀치며

화형식 불꽃 속의 허깨비처럼 고꾸라졌다

빨간 피 시멘트에 후두둑 쏟아지는데

네, 네에 잘 알겠습니다

오체투지 그대로 땅에 엎어져

눈물나고 평화로워라

온 생애가 일시에 가뿐할 뿐이다

내 몸에 이런 뜨거운 전율이 숨어 있었다니

끝내 빳빳하던 이마

더 이상 낮출 수 없이 겸허히 땅에 대고 보니

온통 아늑한 살결일 줄이야

눈앞에 부서지는 별들을 헤치고 일어나

비로소 사방 돌아다본다

보아라, 이마에 찍힌 이 싱싱한 불두(佛頭)

나 홀연히 니르바나에 임했노라


넘어진다는 것은 몸이 직립의 균형을 잃어 잠시 수평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직립을 유지하려다 더 세게 바닥에 부딪친 몸에는 상처가 생기지만 그 상처를 통해 오래된 직립의 습관에 포박당했던 본성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시인은 피를 흘리는 뜨거운 몸의 본성을 뜻밖에 만나 전율하면서 그 앞에 겸허하게 오체투지 한다. 그 찰나의 깨달음을 니르바나라고 과장해도 상쾌하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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