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신화가 된 혁명가 ‘젊은날의 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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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체 게바라 지음, 홍민표 옮김, 황매, 284쪽, 1만원

‘체 게바라가 살아 있다면’ 하는 바람은 그가 1967년 볼리비아에서 학살을 피해 76세의 노인으로 생존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젊은이들의 티셔츠에 인쇄된 시대의 팝 아이콘으로 체 게바라가 ‘상품화’됐다고 분개할 필요는 없다. 때 이른 비극적 죽음 때문에 그를 영원한 혁명 영웅으로 추앙하는 좌파의 ‘신화화’도 불필요한 일 아니겠는가.

그를 고정된 무엇이라고 규정짓지 마라. 부유한 집안 출신의 촉망받는 의사에서 혁명가로, 쿠바 혁명정부의 영웅에서 다시 밀림의 게릴라로, 보장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그였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소명이 영원히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항상 호기심을 갖고, 모든 것을 들여다보며, 그리고 항상 어떤 곳에도 뿌리 내리지 않는….”

체 게바라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남미 대륙 여행에서 이렇게 적었다. 떠난 그를 붙잡지 마라. 그가 돌아오길 바라지 말고 그를 따라 떠나라.

이 책은 브라질 감독 월터 살레스의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원작에 해당하는 여행기다. 당시 게바라는 의대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23세의 청년이었고, 동반자 알베르토 그라나도는 29세의 생화학자였다. 그들은 그라나도가 800달러를 주고 마련한 500cc짜리 중고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51년 12월부터 8개월간 남미 곳곳을 여행했다.

사르트르가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평했던 게바라의 이 여행은 예비 혁명가의 구도적 순례기가 아니다. 영화를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게바라는 유부녀와 춤을 추다 그 여자의 남편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해 적당히 거짓말을 둘러대는 등 치기 어린 20대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비를 벌기 위해 동네 축구단 코치를 맡았다가 선수로 출전해 결승전까지 진출하기도 하고, 짐꾼으로 일하며 주인 몰래 음식을 훔쳐 먹기도 한다. 마을 잔치에 끼어들어 취한 척하며 사람들 몰래 와인을 숨겨뒀는데 누군가 이미 알고 가져가버려 허탈해하는 장면 등은 그가 왜 ‘체’(‘이봐’ ‘친구’ 등을 뜻하는 말로 아르헨티나인들이 말을 꺼낼 때 버릇처럼 쓰는 단어. 훗날 쿠바 혁명 동지들이 게바라의 이 말투를 따서 ‘체’ 게바라라는 별명을 붙여준다)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

실제로 그는 왜 아르헨티나인이 쿠바 혁명에 끼어드느냐는 질문에 “나는 남미 대륙 어디에서도 내가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답한 바 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남미 여행에서 가다듬어진 것이었다. 체 게바라는 칠레 구리 광산 광원들의 비참한 현실을 접하고 극빈환자와 나환자촌을 돌아보며 변해간다. 책 곳곳에서 공산주의와 러시아 소비에트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만일 인류를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눈다면, 나는 민중과 함께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여행을 마친다.

“여러분이 실제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갈 기회가 생긴다면 슬프게도 아직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으며, 심지어는 더욱 나빠진 것들도 많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의 딸이 한국어판 서문에 적은 글이다.
도서출판 황매는 15권짜리 체 게바라 전집을 기획하며 제2권인 이 책을 먼저 내놓았다. 전집의 1권에 해당되는 『체 게바라의 자서전』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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