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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노무현의 적이라 생각했으면 유시민이 협상했겠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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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호 07면

유시민 경기지사 후보 단일화를 이끌어낸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서울 견지동 동아시아미래재단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지방선거는 MB 대 노무현 세력의 대결이 아니라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최정동 기자

6·2 지방선거를 앞둔 야당가가 후끈 달아올랐다. 경기지사 자리를 둘러싼 김진표(민주당)-유시민(국민참여당)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유 후보가 승리하면서다. 국민참여경선(50%)+여론조사(50%)를 혼합해 치른 경선에서 유 후보는 0.96%포인트 차이로 김 후보를 따돌리고 후보가 됐다. 그의 등장은 MB(이명박 대통령) 세력 대 친노(노무현 전 대통령) 세력 간 대결이란 선거 구도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6·2 지방선거 친노와 ‘불편한 동거’ 시작한 손학규

유 후보를 포함해 전국 16개 시장·도지사 선거에서 8곳의 야당 후보가 노무현 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친노 인사들이다. 민주당에선 한명숙(서울)·이광재(강원)·안희정(충남)·김정길(부산) 후보가, 국민참여당 출신으론 정찬용(광주)·유성찬(경북) 후보가 나왔다. 행자부 장관을 지낸 김두관 후보는 무소속으로 경남지사 선거에 綬또杉�.

경기지사 단일화 협상을 이끌어낸 건 손학규(63) 전 민주당 대표다. 2008년 4월 총선에서 낙선한 뒤 춘천의 농가에서 칩거 중인 그가 후보 등록 마감을 앞두고 중재역을 자처했다. 아이러니하게 그의 손끝을 거쳐 나온 ‘작품’이 유시민 단일 후보다. 유 후보는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 불릴 만큼 친노의 핵심 중 핵심이다. 손 전 대표는 생전의 노 전 대통령과 껄끄러웠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그가 한나라당을 탈당했을 때 노 전 대통령은 “원칙과 명분 없는 보따리 정치는 국민에 의해 몰락하고 말았다”거나 “원칙을 파괴하고 반칙하는 사람은 진보든 보수든 관계없이 정치인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손 전 대표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 선거에서 친노 후보들의 지원 유세에 나서고 있다. 민주당 선대위 공동위원장 자격으로다. 지난해 4월과 10월, 두 차례의 재·보궐선거 때 개인 자격으로 특정 후보를 돕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이번 후보 단일화에 대해 “민주당이 희생·헌신해 범민주 진영의 맏형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단일화가) 얘깃거리가 되면서 (야당에 대한) 분위기가 달라졌다. 수도권 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고 자부한다”고 했다.

수도권 야권 3후보 공동실천 선언대회에서의 한명숙(서울시장·왼쪽)·유시민(경기지사) 후보. [뉴시스]

그동안 손 전 대표는 “아직 반성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사양해왔다. 15일 오전 서울 견지동 동아시아미래재단 사무실에서 손 전 대표를 만났다. 그가 고문을 맡고 있는 재단이다.

-물 건너갈 뻔한 단일화 협상을 성사시켰습니다.
“단일화의 당위성을 당사자들이 다 인식하고 있었던 거죠.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단일화가 됐을 수 있어요. 하지만 양쪽이 상처받고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 형식적으로만 단일화하면 뭐합니까. 뺄셈의 단일화가 아니라 덧셈의 단일화가 돼야 한다, 양쪽이 상처받기 전에 빨리 대화하도록 해야겠다, 나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솔직히 저는 그렇게 하면 단일화는 민주당으로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결과가 이렇게 나와 민주당 대표를 지낸 사람으로서 저도 당황하긴 했죠. 하지만 우리가 기득권을 꽁꽁 쥐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숙이고 들어와라 하면 안 되는 거죠. 우리가 버리겠다는, 희생과 헌신의 자세가 (단일화라는)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에 민주당으로선 쓰리고 가슴 아프지만 국민에겐 단일화의 진정성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당 일각에선 혼란스러워하기도 합니다. 단일화는 됐지만 과연 기초단체장 등에서도 단일화 효과가 이어질까 하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고요.
“단일화를 제안하고 중재 역할을 한 사람으로 당원들이나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한테 송구스러운 맘 금할 수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범민주진보 진영의 맏형의 모습을 보여줬고 상당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단일화에선 패배했지만 유시민 후보를 내세울 수 있는 큰 승리를 한 겁니다. 그런 면에서 수도권 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고 자부해요. (선거) 분위기가 달라졌고 (단일화가) 얘깃거리가 됐잖아요. 투표장에 안 나올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됐잖아요. 민주주의의 묘미를 그대로 보여준 겁니다.”

-경선 직후 “경선의 승자가 김진표 후보”라고 했는데요.
“김진표 후보의 자세는 정말 아름다운 것이었고 대인의 풍모를 보여줬어요. 가만히 있었으면 자동적으로 (김 후보로) 단일화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단일화 협상에 응했고, 경선 방식과 조건에서도 끝까지 고집하지 않고 타협했어요. 끝나고 나서도 흔쾌하게 승복하고 적극 돕겠다는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그 자체가 큰 그릇을 보여준 것이고, 우리 정치에 아름다운 모습이었어요. 김진표 의원은 경선에선 졌지만 정치적으론 당당한 승자가 된 겁니다. 그건 민주당의 승리죠. 당원들은 어디 가서도 국민들한테 떳떳하게 얘기할 거리가 생긴 거죠.”

-유시민 후보는 40억원에 달하는 ‘유시민 펀드’가 조성될 만큼 열성팬이 있는 반면 안티 세력도 많습니다. 유 후보의 출현으로 선거 구도가 MB 대 노무현 세력 대결이 굳어진 측면이 있어요.
“춘천에 있으면서 경기도 지사 후보 단일화가 이번 지방선거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워낙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가 독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성사되면 선거를 해볼 수 있고 성사가 안 되면 선거 해보나마나다, 도 아니면 모 게임이라고 생각했지요. 단일화가 안 되면 서울시장 선거도 새로운 동력을 얻지 못합니다. 인천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

‘유시민 펀드’는 새로운 정치자금 모금 방식이다. 불특정 다수로부터 돈을 빌린 뒤 일정기간(3개월) 후 이자를 붙여 돌려주는 방식이다. 국민참여당 천호선 최고위원은 “40억여원으로 선거를 치른 뒤 선관위로부터 보조금을 받으면 빌린 돈을 갚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생전에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친노 인사들이 대거 야당 후보가 됐는데 이들의 선거 지원을 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정부·여당은 친노 대 MB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려고 하겠죠. 엄연한 현실은 어떻게 얘기하든 간에 지방선거는 중간평가일 수밖에 없어요. 전국적으로 4000명(정확한 숫자는 3991명)을 뽑는 선거가 중간평가가 아닐 수 없죠. 광역선거는 이미 행정선거가 아닌 정치선거예요. 4년 전 수도권 선거는 전부 한나라당이 됐어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중간평갑니다. 2002년 지방선거 때도 수도권 세 군데 다 한나라당 후보가 됐어요. 아무리 회칠하고 외면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후보들이 노무현 사람 아니냐. 노무현 정권이 물러난 지 2년반인데 지금의 야당으로선 별로 선택이 없었을 거예요. 지명도나 인지도로 볼 때 결국 그때 사람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들을 친노라고 규정하는데 그건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손 전 대표는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끊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유시민 후보가 단지 제가 전 경기도지사라는 것만으로 나와 대화했겠어요? ‘저 사람은 내 정치적 아버지 노무현의 적인데’라는 생각을 계속 갖고 있으면 나와 대화 테이블에 앉았겠어요? 협상 때 제가 유 후보한테 그랬어요. 당신은 제1야당, 민주당과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50대 50 똑같은 조건으로 확보하려면 안 된다. 제1야당의 현실적 위치를 인정해줘야 한다. 불리한 협상 조건을 수용하고 그걸 극복해서 이기면 좋은 거고, 진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잃는 게 없다고요. 그런데 신뢰 없이 그 얘길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어디서 그 신뢰가 생겼을까요. 또 제가 강원도에 있는 인연으로 해서 이광재 강원도지사 후보가 행사가 있으면 손학규를 빼놓지 않고 부르려 해요. 도지사 캠프 개소식 때, 출마 선언 때 외부 인사는 저 한 명만 불렀어요. 그게 뜻하는 바는 뭐겠어요? …민주당과 범민주 진영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보이지 않는 컨센서스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국민이 뭘 요구하는가에 대한 이해, 그것이 신뢰의 바탕이라고 보는 거죠. ”

-지난해 재·보선 때와 달리 이번엔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는데 이걸 두고 사실상의 정치 재개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제 맘으론 아직도 ‘손 일병’의 위치로 최소한의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인데 전국적인 선거인 데다 당과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선대위원장을 맡았어요.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정부가 국민을 분열시킨 책임에 대해 지적하고 , 심판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

-선거 끝나면 다시 춘천으로 돌아갈 겁니까.
“들고 나오고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나 일단 나올 때 나오더라도 정리는 해야겠죠.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민,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치에 대해 최소한의 정리를 하고 나와야 하지 않겠나 생각해요.”

-선거 전망을 어떻게 보세요.
“쉬운 선거는 아니지만 진정을 갖고 임하면 이기리라고 봅니다. 대의통천이란 말이 있어요. 대의는 하늘로 통한다는 건데 하늘이란 곧 민심이에요. 단일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버리고 희생과 헌신의 정신을 실천했다고 자부합니다. 그 자세를 견지해 헌신하는 자세를 보이면 국민들이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해요.”

죽은 게 죽은 게 아니다
2시간 가까이 계속된 인터뷰. 그는 춘천의 농가 생활을 얘기했다.그러면서 기자에게 “잔디가 가을에 누렇게 되고 봄에 다시 파래지는데 누런 잔디는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선문답 같은 얘기를 이어갔다. 계속되는 손 전 대표의 설명.

“올봄에 , 놀라운 생명의 부활을 봤어요. 누런 잔디가 밑에서부터 물이 올라와 누런 게 파랗게 돼요. 또 한쪽에선 새싹이 올라와요. 누런 잔디는 죽은 건데, 그게 죽은 게 죽은 게 아니더라고요. 놀라운 자연의 힘과 생명력을 느끼게 돼요. 춘천에서 오골계를 기르는데 겨울에 병아리를 깠어요. 밖이 추우니까 방안으로 데려와서 따뜻하게 전기장판 위에 놓아주는데 결국 며칠 못 살고 죽어요. 그런데 영하 20~30도 밖에서 찬바닥에 어미가 품고 있는 병아리들은 너끈히 살아요. …우리가 환경을 중시하고 자연을 말하는데, 또 우리 정치의 화두 중 하나가 생명인데, 자연에서부터 배우고 시작하는 정치가 돼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는 또 세종의 정치도 거론했다. “요즘 한글 창제를 다시 생각해봐요. 없고 못 배운 평범한 백성에 대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연민과 애정 없이는 한글 창제는 생각 못해요. 혼천의, 측우기를 만들고 상인 출신인 장영실을 우대하고 한 것은 오직 농사짓는 백성들에게 최소한의 도구라도 만들어줘야겠다는 백성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할 수 없었던 일예요. 한글이나 측우기가 특별히 머리 좋은 사람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요. 집현전 학자들이 잠들었을 때 세종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 덮어주는데 그건 백성을 덮어준 것이거든요. 이런 걸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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