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단호한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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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병근(1962~ ), 「단호한 것들」 전문

나무는 서 있는 한 모습으로
나의 눈을 푸르게 길들이고
물은 흐르는 한 천성으로
내 귀를 바다에까지 열어 놓는다

발에 밟히면서 잘 움직거리지 않는 돌들
간혹, 천길 낭떠러지로 내 걸음을 막는다
부디 거스르지 마라, 하찮은 맹세에도
입술 베이는 풀의 결기는 있다

보지 않아도 아무 산 그 어디엔
원추리 꽃 활짝 피어서
지금쯤 한 비바람 맞으며
단호하게 지고 있을 걸

서 있는 것들, 흔들리는 것들, 잘 움직이지 않는 것들,
환하게 피고 지는 것들
추호의 망설임도 한점 미련도 없이
제 갈길 가는 것들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들


내가 하루 종일 주저하고, 이리저리 재고, 후회하고, 한숨쉬고, 속 끓이고, 마음 뒤척이고, 여러 번 결심을 바꾸는 동안, 산과 들의 그 많은 풀들은 당연하다는 듯 누렇게 죽어가고 나무들은 영하 10도의 밤바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군가가 뽑고 베고 그 위에 포장도로를 낸다 한들 그 자세가 꽃피고 푸른 광합성을 할 때와 조금이라도 다르겠는가. 폭포를 향해 가는 물처럼 망설임 없이 잔잔할 뿐.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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