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 지방 상권] 상. 활기 잃은 동대문 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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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3~4년 전만 해도 동대문 새벽시장에 가면 언제나 볼 수 있었던 러시아.동유럽의 보따리상은 이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발디딜 틈이 없었던 매장도 썰렁해졌다. 종업원을 두지 않고 업주 혼자서 가게를 보는 '나홀로 가게'가 부쩍 늘었다. 경기가 좋을 땐 종업원 세 명이 밤.새벽.낮을 번갈아 근무했었다. 또 상인들이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도시락을 싸와 주변 음식점도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일본.중국.대만 등지의 보따리상들까지 몰려와 아시아 패션 공급기지로 각광받던 동대문시장이 활기를 잃고 있다. 동대문시장 외국인구매안내소 고동철 소장은 "2~3년 전부터 외국인 보따리상들이 거의 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말했다. 패션도매상가 뉴존의 서범준씨는 "도매시장은 외국 바이어가 아무리 많이 와도 내수가 받쳐주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며 "지금은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사갈 소매점이 갈수록 사라져 도매상권이 죽고 있다"고 말했다. 동대문에서 7년째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송모(37)씨는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때 붉은악마 티셔츠를 판 이후 계속 매출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송씨의 공장은 매달 적어도 1000벌 이상을 만들어야 유지가 되는데 요즘 이것도 못 채우는 달이 더 많다고 한다.

여성용 청바지 도매상 김모(44.여)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중국산을 가게에 놓지 않았다. 직접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좀 비싸더라도 제법 괜찮은 청바지를 만들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 처음으로 중국에서 만든 탑코트를 수입했다. 청바지에 탑코트를 받쳐 입는 패션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올해도 탑코트를 수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동대문이 어쩌다 중국산을 파는 시장으로 전락했는지 모르겠지만 중국의 생산원가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게 김씨의 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봉제공장들이 경쟁적으로 중국으로 나가고 있다. 업계의 추산에 따르면 서울지역 봉제업체의 15% 가량인 1000여곳이 최근 중국에 새 둥지를 틀었다.

한국에선 가내 수공업을 하던 공장주들이 중국에선 최소 200~300평 공장에 수백명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생산단가가 낮아 대량생산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동대문 일대의 봉제 물량을 거의 빨아들이다시피하고 있어 남은 공장의 경영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더구나 중국 공장들이 최근 들어 자수.장식.주름.워싱 등이 들어간 비교적 고가의 '디자인물'을 만들기도 해 국내 봉제공장을 위협하고 있다. 봉제공장이 중국으로 이전하면서 봉제기술의 유출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송씨는 "중국 공장이 보름 걸리는 납기만 단축한다면 국내 공장의 설 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상인과 공장주들은 자구책을 강구 중이다. 동대문 시장의 50개 업체는 가칭 'FNG(패션 뉴 제너레이션)' 협회를 준비 중이다. ▶마케팅.비즈니스 창구 단일화▶공동 수출 판로 개척 등을 해보려는 것이다. 공장주들이 많이 가입한 인터넷 카페 '봉제인의 쉼터'는 서울의류업노조와 객공(프리랜서 기술자) 인터넷 카페 등과 손을 잡고 '의류업종살리기 공동본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 기획취재팀=양선희.홍주연.이철재(산업부), 황선윤.서형식(사회부) 기자

다음회는 '<중> 대형유통점이 장악한 시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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